1천500년전 신라왕족의 호화로운 식생활…돌고래·복어 등 먹어
송고시간 2020-09-07 14:23
자임동근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서봉총 재발굴 보고서에서 밝혀
Abstract
The tomb of Seobongchong in Gyeongju is one of the royal tombs of Silla excavated in 1926 and 1929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Despite the fact that excavation of the mound, an important academic resource, yielded magnificent burial goods including a gold crown decorated with a phoenix no report was published about that even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which has kept the excavated articles, recognized this problem later and published a report which compiled the excavated articles –in 2014 to secure basic data for the study of the history of Silla.
Afterward, it newly excavated Seobongchong in 2016 and 2017 to publish reports on the structure of the tomb.
Though no new burial goods were identified as the tomb was re-examined after it had been excava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quite a few pieces of new information that could not be confirmed at the time of excavation has come to light.
It became clear that Seobongchong was a pair of tombs connected by the oval-shaped northern and southern tombs with diameter measuring 46,7m and 25m, respectively.
The height of the stone mound found inside the northern tomb is unknown, but its maximum diameter is about 18,5m.
The wooden chamber of the northern tomb with a coffin in it is an entirely aboveground structure with inner and outer walls.
The southern tomb is also a double-walled structure; unlike the northem one, however, the wooden chamber is not entirely aboveground, but nearly half of it is under the ground.
Signs of rituals using large jars were confirmed outside both northern and southern tombs. Numerous animal bones found inside these jars are believed to be offerings to the owner of the tomb presented during the rituals that took place after the tomb was built.
The discovery of the stone offertory table in front of the southern tomb confirms that rituals were held regularly at the tomb site.
Until now, it has been argued that Silla's regular tomb-site rituals started in the Middle Period (654-780).
The newly found the stone offertory table in front of the southern tomb is an important discovery, showing that tomb-site rituals might have started as early as the 6th century.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경주 서봉총 재발굴 발굴보고서 발간에 즈음해 그 성과를 요약한 보도자료를 배포했으니, 아래가 그 전문이다.
역사기록에 없던 신라의 독특한 제사 음식이 확인되다!
경주 서봉총의 재발굴에서 돌고래, 성게, 복어 등 확인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은 일제가 조사한 경주 서봉총을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재발굴한 성과를 담은 보고서를 간행했다.
경주 서봉총은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에 있는 신라 왕족의 무덤 중 하나로 서기 500년 무렵에 만들어졌다. 서봉총은 두 개의 봉분이 맞닿은 형태인 쌍분으로, 먼저 만들어진 북분(北墳)에 남분(南墳)이 나란히 붙어 있다.
북분은 1926년에, 남분은 1929년에 각각 발굴됐다. 무덤 이름은 당시 스웨덴[瑞典] 황태자가 조사에 참여한 것과 봉황(鳳凰) 장식 금관이 출토된 것을 기념해 서봉총(瑞鳳塚)으로 붙여졌다.
서봉총은 금관을 비롯해 다수의 황금 장신구와 부장품이 출토되는 등 학술적 가치가 빼어난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제는 발굴보고서를 간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국립중앙박물관은 2014년 서봉총 출토품 보고서를 간행하고, 2016부터 2017년까지 서봉총을 재발굴한 후 이번에 그 성과를 담은 유적 보고서를 발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재발굴은 일제가 밝히지 못한 무덤의 규모와 구조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일제는 북분의 직경을 36.3m로 판단했으나 재발굴 결과 46.7.m로 밝혀져 당시 조사가 잘못되었음이 드러났다. 또 서봉총의 무덤 구조인 돌무지덧널무넘[積石木槨墓]의 돌무지는 금관총과 황남대총처럼 나무기둥으로 만든 비계 틀[木造架構]을 먼저 세우고 쌓아올렸음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덤 둘레돌[護石]에 큰항아리를 이용해 무덤 주인공에게 음식을 바친 제사 흔적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이번 재발굴을 통해 당시 신라에서는 무덤 주인공을 위해 귀한 음식을 여러 개의 큰항아리에 담아 무덤 둘레돌 주변에 놓고 제사지내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제사는 일제강점기 조사에서도 확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같은 역사기록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서봉총 남분의 둘레돌에서 조사된 큰항아리 안에서 동물 유체(발굴에서 출토되는 동물 생태물로 뼈, 이빨, 뿔, 조가비 등을 말함)들이 많이 나와 당시 제사 음식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재발굴의 독보적인 성과이다.
큰항아리 안에서 종(種)과 부위를 알 수 있는 동물 유체 총 7,700점 확인되었다. 이 중 조개류[貝類] 1,883점, 물고기류[魚類] 5,700점이 대다수이지만 아주 특이하게 바다포유류인 돌고래, 파충류인 남생이와 함께 성게류가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신경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먹기 어려운 복어도 발견되었다.
이번에 확인된 동물 유체들은 신라 무덤제사의 일면을 밝힐 수 있는 정보이기도하지만 한편으로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동물 유체에서 연상되는 복어 요리, 성게, 고래 고기는 당시 신라 왕족들이 아주 호화로운 식생활을 즐겼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조개는 산란기 때 독소가 있어 식용하지 않는 점, 또 많이 확인된 청어와 방어의 회유시기 등을 고려할 때 이들은 대부분 가을철에 포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이 제사가 무덤 축조 직후에 실시된 점을 고려하면, 서봉총의 남분은 가을에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향후 서봉총 북분과 남분의 주인공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서봉총 재발굴은 일제가 확인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을 조사하는 뜻깊은 기회가 되었고, 제사와 동물 유체를 통해 신라사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앞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은 서봉총의 발굴 성과를 적극 활용하여 전시 등으로 공개하고, 학계와 대중에게 신라 왕족의 무덤을 이해하는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연구를 심화시켜 나갈 것이다.
발굴보고서 요약은 다음과 같다.
摘要
庆州瑞凤塚是在日本殖民时期由朝鲜总督府于1985年与1929年发掘的新罗王陵级别墓葬之一。此墓葬出土了凤凰装饰的金冠, 以及其他华丽的随葬品等重要的学术研究资料, 但在当时却未能刊行发服告。保管当时出土文物的国立中央博物馆认识到这样的问题, 为确保新罗史研究的基础资料, 于2014年出刊了出土文物的整理报告书。
此后, 为刊行关于墓葬形制的报告书, 于2016年与2017年对瑞凤塚进行了再次发掘。由于此次是对日本殖民时期曾发掘墓葬的再次发掘, 因此并未能发现新的随葬品,但却获取了当时未能确认的许多新资料。
根据考古调查, 瑞凤塚的平面形态为椭圆形的北域与南相连接的双, 各自的圆径为467米与25米。
北域的封士内部确认有积石部, 积石的高度不详, 最大圆径为18.5米左右。
其木桿为地上式构造, 具有内外悍的双重木梓态,内置木棺。
南坟虽然也是双重木梓构造, 但是与北攻不同的是, 其木桿并非为地上式,而是绝大部分构造位于地下。
北与南域的护石外侧发现有使用大壶进行祭祀的痕迹, 并确认了大壶内部大部分为动物骨骼遗存。
由此可判断, 在墓葬修筑后, 曾在大壶里放食物来祭祀墓主人。
在南坟调查中还发现了墓的石供桌, 是表明曾经定期进行过墓葬祭祀的证据。
迄今为止, 一直有主张认为新罗定期举行墓的祭祀始于新罗中期(654-783年), 而新发现的南石供桌是可将此推论上溯至6世纪的重大发现。
慶州の瑞鳳塚は日帝強占期に朝鮮総督府が1926年及び1929年に発掘した新羅王陵クラスの古墳の一つである。この古墳は鳳凰が装飾された金冠をはじめ、華麗な副葬品が出土した重要な学術資料であるにも関わらず、報告書が発刊されなかった。当時の出土品を保管している国立中央博物館はこうした問題点を認識し、新羅史研究の基礎資料を確保するために出土品を整理した報告書を2014年に発刊した。続いて古墳の構造に関する報告書を刊行するために2016年から2017年にかけて、瑞鳳塚を再発掘した。日帝強占期に発掘した古墳を再調査したものであるゆえ、新たな副葬品は確認できなかったが、当時には確認できなかった新たな情報を多く獲得した。調査結果によると瑞鳳塚は平面形態が楕円形の北墳と南墳がつながった双墳であり、それぞれの長径は46.7mと25mだった。北墳の封土内部からは積石部分が確認されたが、高さははっきりせず、長径は18.5m程度だった。木柄は完全な地上式構造で、内と外部で成り立つ二重の木綿構造で、その中に木棺を配置した。 南墳も二重の木鞘構造であるが、木郁は北墳と異なり、地上式ではなく半分ほど地下にある構造だった。そして、北墳と南墳の護石の外側に大壺を利用した祭祀の痕跡が確認された。大壺の内部からは動物の骨が多く確認されたのだが、これは墓を築いた後に大壺に食物を入れて、被葬者に捧げた祭祀行為の痕跡と判断される。また南墳においては床石が調査されたが、これは祭祀が定期的に行われていたことを示す証拠である。これまで新羅において定期的な陵墓に対する祭祀は新羅の中代(654~780年)に始まったと主張されて来た。しかし、南墳の床石はそれが6世紀までさかのぼることが出来ることを示す重要な発見となった。
요약
경주 서봉총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26년과 1929년에 발굴한 신라 왕릉급 무덤 중 하나이다. 이 무덤은 봉황이
장식된 금관을 비롯해 화려한 부장품이 출토된 중요한 학술자료임에도 불구하고 보고서가 발간되지 못했다. 당시 출토품을 보관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신라사 연구의 기초 자료 확보를 위해 출토품을 정리한 보고서를 2014년에 출간했다. 다음으로 무덤의 구조에 대한 보고서 간행을 위해 2016년과 2017년에 서봉총을 재발굴했다. 일제강점기 발굴한 무덤을 다시 조사한 것이라서 새로운 부장품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당시 확인하지 못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확보했다. 조사 결과 서봉총은 평면형태가 타원형인 북분과 남분이 연결된 쌍분이었고, 각각의 직경은 46.7m와 25m이었다. 북분 봉토 내부에서 적석부가 확인되었는데, 높이는 알 수 없고, 최대 직경은 18.5m 정도이다.
목곽은 완전한 지상식 구조이며, 내곽과 외곽으로 구성된 이중의 목곽이며, 그 안에 목관을 배치했다. 남분은 이중의 목곽 구조이지만 목곽은 북분과 달리 지상식이 아니라 절반 정도가 지하에 있는 구조였다. 북분과 남분의 호석 밖에서 대호를 이용한 제사 흔적이 확인되었다. 대호 내부에서 동물뼈가 다수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무덤 축조 이후 대호에 음식물을 넣어 무덤 주인공에게 바친 제사로 판단된다. 또 남분에서 무덤의 상석이 조사되었는데, 이것은 무덤제사가 정기적으로 실시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지금까지 신라에서 정기적인 무덤제사는 신라 중대(654~780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새롭게 찾은 남분의 상석은 그것이 6세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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