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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성남 갈현동 갈마치 골짜기에서 출현한 조선전기 거대 사찰(유적 브로셔 첨부하니 다운로드하시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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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갈현동 유적 브로슈어-7-복사.pdf
13.24MB

 

이 소식은 그저께 요로를 통해 들어왔으니, 골자를 추리자면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469-1번지 일원에서 조선시대 전기(1392~1506년)에 만든 것으로 생각하는 왕실 원찰급 규모 거대 사찰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이며, 이를 토대로 삼아 성남시는 이 일대를 경기도문화재로 지정하고자 한다고 해서 오늘 공식 관련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성남시에 의하면 이 흔적은 주변 토지 소유주가 그것을 발견해 제보함으로써 존재가 보고됐고, 이를 토대로 삼아 최근 2년간 발굴조사를 했다고 한다. 보니 조사 의뢰를 받은 기관은 중앙문화재연구원이라, 한때는 발굴업계의 삼성이라 해서 전국 주요한 발굴현장은 독식하던 중문연 시대가 있었지만, 어찌한 셈인지 근자 이 연구원 존재감을 각인하는 소식은 없다가 이번에 제대로 다시금 우린 살아있음을 보고한다. 

 

딱 보면 언덕배기 아래에서 위쪽을 바라 봤다. 딱 봐. 맨 뒤쪽 중앙에 앉아야 아래를 다 조망할 거 아닌가베? 저런 자리가 바로 오야붕 자리다. 저기 금당이 있자나? 그리고 금당은 최고로 신성한 곳이라, 축대를 돌출해서 위압감을 줬자나? 왜? 그래야 가오가 살잖아.



어찌하여 이곳을 조선왕실 원찰願刹이라 했는지는 뒤에서 보기로 하고, 암튼 그네들 조사성과에 의하면 현재로서는 이름을 알기 힘든지, 이곳에 있던 사찰이 원찰이라 함은, 더구나 왕실 원찰이라 함은 주변에 그에 걸맞는 왕실 주요한 인물의 명복을 비는 시설이 있었고, 그러한 의례와 관리를 담당하던 불교사찰이라는 뜻이다.

조선전기만 해도 숭유억불이라 하지만, 웃기는 소리라, 불교는 죽지 않아서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 중이었으니, 심지어 왕릉 원찰도 따로 있었다. 

 

봤제? 저번 서해안 갯벌서 건져올린 거랑 똑같지?

 

 

이 갈현동 절터(이를 조사단에서는 갈현동사지葛峴洞寺址라 했다만)는 조사 결과 규모가 5천738㎡에 걸쳐 사역이 존재하며, 계곡 경사진 언덕배기에다가 석축으로 3단 대지垈地를 만든 다음 부처님을 봉안하는 주축 메인 시설인 금당金堂을 비롯한 승려들 거처인 요사채와 같은 부속 건물을 배치한 것으로 드러났댄다. 

나아가 뜰인 중정中庭과 지붕 달린 복도 시설인 회랑回廊, 바닥에 깐 돌들인 박석薄石, 사람이 다니는 길인 보도步道 등도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사찰 동쪽과 회랑 주변에서는 당연히 배수시설이 있어야겠고, 판석에 구멍을 뚫어 만든 도랑은 경복궁·창덕궁 등의 궁궐과 양주 회암사지에서 확인된 사례와 유사하다고 한다. 

 

글자 읽을 수 있을 듯한데?



사찰 서쪽 가장자리에서는 기와를 굽던 가마터도 드러났다. 기와 가마와 사찰이 결합하는 조선전기 좋은 사례로는 강남 세곡동 유적이 있다. 

주목할 대목은 출토 유물. 조사단은 조선시대 전기에 왕실과 관련된 건물에서만 사용하던 ▲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인 취두鷲頭와 용두龍頭 ▲마루 장식 기와인 잡상雜像 ▲서까래 보호·장식 기와인 토수吐首 ▲청기와 ▲마연磨硏 기와 ▲용·봉황문 막새기와 등이 있음을 주목한다. 

바로 이 출토유물 분석을 통해 이 사찰이 왕실 원찰이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나아가 연화문蓮花紋·범문梵文·‘만卍’자 새김 막새기와도 확인했다.

조사단은 사찰 건물구조 배치 양상과 출토유물을 볼 때 고려시대부터 존재하던 기존 사찰을 조선 전기에 크게 새로 고쳐 왕실 원찰로 삼았다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한다.

발견지점 동네가 갈현동葛峴洞이라, 현峴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볼짝없이 새재다. 고갯길 길목이라는 뜻이다. 내가 항용 비유하듯이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지점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손오공!!! 잡상님들이다. 이런 회암사지 출토품이랑 비교해도 재밌다.

 

실제 이 절터는 갈현동과 상대원동을 남북으로 잇는 대원터널 위에 위치하고, 동서로 이어지는 구릉 남사면 언덕대기 7~8부 높이 골짜기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는 광주 세촌면에서 경안면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갈현, 곧 갈마차에 위치하고, 최근까지는 밭과 과수원이었다. 

발굴성과를 더 상론하면

절터는 완만한 남쪽 경사지대는 깎아  메우고 석축으로 대지를 조성했다. 

맨 아래 남쪽 1단에는 중앙계단과 출입문, 박석 보도, 온돌이 있는 건물, 회랑이 존재하며, 그 서쪽에서 기와가마가 드러났다. 

그 바로 위 제2단에서는 중정과 4개 부속 건물동이 있으며, 회랑은 동서 방향으로 나 있다. 

맨 위쪽이 당연히 남면南面하는 북극성 위치라 여기가 바로 부처님이 정좌해야 하는 곳이라, 이는 발굴도면 보지 않아도 안다. 그 중앙 맨 높은 지점에 금당을 안치했으니, 그 좌우와 동쪽 끝 확장구역에 건물이 확인됐다. 북쪽 경계에서는 축대가 설치됐으니, 이는 요즘 한국 산사에서도 흔하다. 대웅전 바로 뒤가 바로 산이라, 붕괴를 막고자 석축을 쌓는 일이 저때라고 없었겠는가? 고고학? 실상 알고 보면 지극한 상식의 영역이다. 

사역 서쪽 경계는 축대라, 아마 이쪽에 좀 기울어진 지점인가 보며, 그 반대편 동쪽은 담장이라 높은 지점 아니겠는가?

주요 건물들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어칸御間(중앙 중심칸을 이리 표현하나 보다. 암것도 아닌 말 참 어렵게 쓴다고 용쓴다.)이 넓고 앞뒤 퇴칸退間이 좁은 형태가 공통으로 확인된다는데, 그럼 대체로 중앙 남대문이 넓지 좁겠는가? 

사역 동쪽 경계부와 회랑 주변부에서 배수시설이 확인되고 특히 중정 남동쪽 모서리와 서쪽에서는 판석을 구멍을 뚫은 집수구가 설치되었다는데 이 역시 요즘 절에서는 흔하다. 

금당은 전면부 석축을 돌출해 돋보이게 했다는데, 이 역시 요즘 산사를 보면 결코 이채롭지 않다. 이런 대웅전 건물은 보통 정사각형에 가까운데 건물 내부에는 기둥이 없이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는데, 그럼 기둥 박으면 부처님 자리가 없어지는데 당연하지 않겠는가? 

출토 유물 중 치미라 해서 지붕 양쪽에 대따시하게 장식하는 거대 기와는 몰골이 천상 저번 어디더라? 서해 갯벌에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건져냈다고 떠들썩하게 선전한 그 판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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