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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여러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

by taeshik.kim 2020.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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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신어世說新語》 제9편은 제목이 품조品藻라 이는 곧 시류별 품평이라는 뜻이니, 이를 영어 옮김 classification according to excellence는 그 의미를 잘 살렸다고 본다.

그 해제에서 김장환은 "본 편에서 실려있는 고사는 부자·형제·동료·친구처럼 서로 관련이 있는 인물이나 기질이 서로 비슷한 사람들을 비교하고 품평하여 그 우열과 고화를 구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이라고 설명한다.(김장환 옮김 《세설신어 中》, 살림, 2002. 2, 초판 3쇄 319쪽)

총 88편이 실린 이 편 첫 화話는 다음이다. 텍스트는 여가석 찬 《세설신어잔소世說新語箋疏》다. 파란 고딕이 유의경劉義慶이 본래 쓴 《세설신어世說新語》  본문이며, 나머지는 유효표劉孝標 주注다. 


世說新語箋疏 品藻第九

汝南陳仲舉,潁川李元禮二人,〔一〕共論其功德,不能定先後。蔡伯喈續漢書曰:「蔡伯喈,陳留圉人。通達有俊才,博學善屬文,伎藝術數,無不精綜。仕至左中郎將,為王允所誅。」評之曰:「陳仲舉彊於犯上,李元禮嚴於攝下。犯上難,攝下易。」張璠漢紀曰:「時人為之語曰:『不畏彊禦陳仲舉,天下模楷李元禮。』」仲舉遂在三君之下,謝沈漢書曰:「三君者,一時之所貴也。竇武、劉淑、陳蕃,少有高操,海內尊而稱之,故得因以為目。」元禮居八俊之上。薛瑩漢書曰:「李膺、王暢、荀緄、朱寓、〔二〕魏朗、劉佑、杜楷、趙典為八俊。」英雄記曰:「先是張儉等相與作衣冠糾彈,彈中人相調,言:『我彈中誠有八俊、八乂,猶古之八元、八凱也。』」〔三〕謝沈書曰:「俊者,卓出之名也。」姚信士緯曰:「陳仲舉體氣高烈,有王臣之節。李元禮忠壯正直,有社稷之能。海內論之未決,蔡伯喈抑一言以變之,疑論乃定也。」〔四〕

【校文】
注「朱寓」「寓」,景宋本及沈本作「宇」。注「劉佑」「佑」,沈本作「祐」。

【箋疏】
〔一〕李慈銘云:「案二人疑士人之誤。」
〔二〕程炎震云:「宋本朱寓作朱宇,與范書合。」
〔三〕張儉等二句宋本疑有誤。袁本亦不甚可解。
〔四〕御覽四百四十七引士緯,與世說及注略同。

 

[유의경 본문]

汝南陳仲舉,潁川李元禮二人,〔一〕共論其功德,不能定先後。蔡伯喈續漢書曰:「蔡伯喈,陳留圉人。通達有俊才,博學善屬文,伎藝術數,無不精綜。仕至左中郎將,為王允所誅。」評之曰:「陳仲舉彊於犯上,李元禮嚴於攝下。犯上難,攝下易。」張璠漢紀曰:「時人為之語曰:『不畏彊禦陳仲舉,天下模楷李元禮。』」仲舉遂在三君之下,謝沈漢書曰:「三君者,一時之所貴也。竇武、劉淑、陳蕃,少有高操,海內尊而稱之,故得因以為目。」元禮居八俊之上。薛瑩漢書曰:「李膺、王暢、荀緄、朱寓、〔二〕魏朗、劉佑、杜楷、趙典為八俊。」英雄記曰:「先是張儉等相與作衣冠糾彈,彈中人相調,言:『我彈中誠有八俊、八乂,猶古之八元、八凱也。』」〔三〕謝沈書曰:「俊者,卓出之名也。」姚信士緯曰:「陳仲舉體氣高烈,有王臣之節。李元禮忠壯正直,有社稷之能。海內論之未決,蔡伯喈抑一言以變之,疑論乃定也。」〔四〕 

 

[유효표 주]

《속한서續漢書》에 말했다:채백개蔡伯喈는 진류陳留의 어圉 사람이다. 통달하고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서 박학博學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기예伎藝와 술수術數까지 정통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벼슬은 좌중랑장左中郎將에 이르렀지만 왕윤王允한테 주살되었다. 

장번張璠의 《한기漢紀》에 말했다: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평하기를 "강권[彊禦]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진중거陳仲舉이며, 천하의 모범이 되는 이가 이원례李元禮"라고 했다.  

사침謝沈의 한기《漢書》에 말했다:삼군三君은 한 시대가 존귀하게 여긴 이들이다. 두무竇武·유숙劉淑·진번陳蕃은 젊어서부터 높은 지조를 지녀 천하 사람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칭송했기에 그런 품평을 얻을 수 있었다. 

설영薛瑩의 《한기漢書》에 일렀다:이응李膺·왕창王暢·순곤荀緄·주우朱寓·위명魏朗·유우劉佑·두해杜楷·조전趙典을 팔준八俊이라 한다.  《영웅기英雄記》에 일렀다:이에 앞선 장험張儉 등이 서로 함께 규탄할 관리 명단을 작성했는데 규탄 당장 사람들이 서로 농담하기를 "규탄 당한 우리 중에는 진실로 팔준八俊과 팔예八乂가 있는데 이는 옛날의 팔원八元、팔개八凱와 같다"고 했다. 사침謝沈의 책(앞서 나온 한기《漢書》)에 말했다:준俊이란 특출나게 뛰어난 이름이다. 요신姚信의 《사위士緯》에 보이는 말이다:진중거陳仲舉는 기개가 고결하고 강직해서 제왕의 신하가 될 자질을 지녔다. 이원례李元禮는 충忠壯하고 정직正直해서 사직을 보필할 재능이 있다. 천하에서 그들의 우열을 논했지만 결정되지 못했는데 채백개蔡伯喈가 한 마디로 그것을 판가름하니 논의가 마침내 결정되었다.  

 

[태식 補]

《속한서續漢書》는 사마표司馬彪 찬이라 《수서 경적지隋書經籍志》 에서는 전체 83권이며 진晋 비서감秘書監 사마표司馬彪 찬撰이라 했으니, 사마표는 생년을 알 수 없으나, 306년에 사망한 인물로,  字를 소통紹統이라 하며 하내군河内郡 온현温县 사람이라, 西晋 종실宗室로 고양왕高阳王사마목司馬睦의 장자長子다. 서진 무제武帝 시절 비서랑秘書郎과 비서승秘書丞, 통직산기상시랑通直散骑侍郎 등을 역임하고는 광휘光熙 원년(306)에 거세去世하니 항년 60여 세라 했다.

저술로 《속한서》 외에도 《구주춘추九州春秋》와 《장자주庄子注》 21卷,《병기兵記》 20卷,문집文集 4卷이 있었지만 모조리 실일失佚했다. 《문선文選》에 《증산도贈山濤》, 《잡시雜詩》 등이 남았다. 《속한서》 중 8지志는 나중에 범엽이 죽고 난 다음에 범엽이 보완하지 못한 《後漢書》에 붙어 살아남았다. 

장번張璠은 위진魏晋시대 사학가로서 《후한기後漢紀》가 있으니. 진晋 왕조가 창립한 후 우부虞溥, 곽반郭頒과 더불어 그 왕조의 영사令史가 되었다. 그의 《후한기》는 미완성 30권이라 일찍이 망실하고는 다른 책에 인용되었다. 

사침謝沈(290~342)은 字가 행사行思로, 회계會稽 산음山陰 사람이다. 晉朝 대신大臣이자 사학자로 손오孫吳 익정도위翼正都尉를 지낸 사수謝秀의 아들이다. 박학다식하고 경사經史에 능통했다. 태위太尉 치감郗監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하충何充 아래서 회계참군会稽参军으로 있었지만 연로한 모친 봉양을 이유로 퇴거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평서장군平西将军이자 정북장군征北将军인 채모蔡谟가 불러도 가지 않았으며 밭을 갈았다. 晋 강제康帝가 죽위하자 태학박사太学博士로 제수되고 탁지낭중度支郎中으로 옯겼다가 저작랑著作郎이 되었다. 함강咸康 八年에 去世하니 향년 52세. 저술로 《진서晋书》 30여권과 《후한서後漢書》 100권, 《모시毛诗》, 《한서외전汉书外传》 등이 있다.

설영薛瑩(208~282)은 삼국시대 손오孫吳 사람이라, 字가 도언道言, 패군沛郡 죽읍현竹邑县 출신이다. 태자소부太子少傅 설종薛综이 아들이면서 교주목交州牧을 지낸 설우薛珝가 형이다. 비부중서랑秘府中书郎으로 들어가 산기중상시散骑中常侍, 좌국사左国史, 광록훈光禄勋、좌집법左执法. 선조상서选曹尚书, 태자소부太子少傅를 역임하고는 죄에 연루되어 광주广州로 유배갔다. 晋이 吴를 멸하자 낙양洛阳으로 들어가 산기상시散骑常侍를 역임하고는 태강太康 3年에 去世하니 享年 75세였다. 

《영웅기英雄记》는 왕찬王粲이 저술한 사서史书라, 이미 망실되어 전모를 알 수 없음이 아쉽다. 다른 문헌에 인용된 내용을 분석하면 그 주요 부문은 건안建安 13년(208) 9월에 완성되었으니, 이는 그가 조조曹操한테 귀순하기 전이라, 한말 영군웅할거시대를 주로 다룬다.  

요신姚信은 동오东吴시대 사람으로 오흥吴兴 출신이다. 전당钱唐의 범평范平을 스승으로 섬기며 《坟》과 《索》을 연구했다. 저술로 《사위士纬》 10권 말고도 《주역주周易注》가 있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사망선고를 내려버린 전해종 

 

 

《세설신어》가 인용한 저들 다양한 한서漢書 혹은 그 시대를 무대로 삼는 기록 중에 제대로 살아남은 것이 드물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 시장에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어니와, 저들을 단 한 순간에 퇴물 취급해 버리고 독야청청을 구가한 것이 있으니, 바로 남조南朝 유송劉宋의 범엽范曄이 저술한 《후한서後漢書》가 나오면서다. 

다만 이 《후한서後漢書》도 한창 써내려가다가 범엽이 역모에 걸려 사형당하는 바람에 그가 채 쓰지 못한 志에 해당하는 부분이 텅 비어, 그 대목만 《속한서續漢書》 중에서 그에 해당하는 8가지 志를 나중에 보완하고 말았다. 

기존 모든 후한과 관련한 역사서가 범엽이 나타나면서 퇴출한 까닭은 첫째, 범엽의 그것이 종래의 모든 한서류를 섭렵해서 녹여 버렸고 둘째, 그 문장 등등이 기존 책들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나옴으로써 더는 저런 기존 책들을 따로 볼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24사 혹은 25사 중에서도 왜 《후한서後漢書》가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더불어 삼사三史로 병칭되었는지, 그 심각성을 제대로 아는 놈이 드물다. 그러기는커녕 유독 국내 관련 학계에서는 《후한서後漢書》를 폄훼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에 수록된 이른바 동이열전東夷列傳에서 비롯하거니와, 

이곳 열전에는 외국전이 육이열전六夷列傳이라는 이름으로 실렸거니와, 그 여섯 가지 외국을 동이東夷·남만南蠻·서남이西南夷·서강西羌·서역西域·남흉노南匈奴·오환烏桓·선비鮮卑로 나눴거니와. 동이열전은 그 첫머리를 차지한다.

 

 

후한서 사망선고를 내린 고병익

 

 

한데 이 동이열전을 국내에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체적으로『三國志』「東夷傳」을 비롯한 諸史書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라 할 것이다. 즉, 야심적인 序論에도 불구하고「東夷列傳」의 夫餘·挹婁·高句麗·東沃沮·北沃沮·濊·韓·倭의 各傳은 當代의 교섭자료를 제외한다면『三國志』의 그것과 순차가 바꾸어진 것 외에는 그 내용이 『三國志』를 부분적으로 수정한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즉,『後漢書』「東夷列傳」찬수의 기본방침은『三國志』「東夷傳」에 의거하여 그 記事를 부분적으로 개편하고, 後漢代의 東夷와의 關係記事를 보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東夷列傳」기사의 약 3/4은『三國志』기사의 개편이고, 范曄이 새로 보충한 기사는 나머지 1/4에 해당한다.(全海宗,『東夷傳의 文獻的 硏究』) 따라서『後漢書』「東夷列傳」의 史料的 價値는 상대적으로『三國志』의 그것보다 낮게 평가된다고 하겠다.

결국 《후한서後漢書》를 이 모양으로 격하하는 데는 고병익과 전해종으로 대표하는 국내 동양사학계 1세대 학도들에서 비롯하는데, 특히 다음 두 가지 논설이 결정타였다.

高炳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 1980.


문제는 저들의 저런 평가가 정당한가다. 이걸 심각히 따지지 아니했다. 저들의 말은 결국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은 《삼국지三國志》의 그것을 축약해서 베꼈다는 것으로 모아지거니와, 일언이폐지컨대 오판이다.  

《후한서後漢書》, 특히 그 동이열전은 《삼국지三國志》의 그것을 베낀 적이 없다. 잘못 베낀 쪽은 후자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열전 역시 그 모태가 된 선대 문헌들이 있는데, 결코 진수가 창안한 대목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진수 역시 선대 문헌에서 베꼈다. 한데 술을 쳐먹고 썼는지,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이 수두룩빽빽이라, 개판으로 베껴서 문맥이 통하지 않는 데가 한두 곳이 아니다. 

범엽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은 《삼국지三國志》의 그것을 베낀 것이 아니라, 저 앞에서 본 저런 선대 문헌들을 종합한 것이다. 둘은 기술 대상 기간이 다르다. 후자가 먼저 편찬되기는 했지만, 대상 시기가 다르다. 물론 그 둘 사이 경계 지점이 있는데 둘 사이에 공통된 이런 부분은 그와는 관련없는 일반정보일 뿐이다. 

그 일반정보도 범엽이 진수를 베낀 것이 아니라, 앞에서 본 저런 문헌들을 참조한 것이다. 

고병익과 전해종은 틀렸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특히 전해종은 두 문헌에서 겹치는 비율을 통계로 작성해서 정말로 범엽이 진수를 베겼다고 확정하다시피 했는데, 그는 몰랐다. 삼국지도 베꼈다는 걸. 같은 문헌을 각기 다른 사람들이 베끼다는 사실을. 이 심각성을 그는 전연 고려하지 못했다. 중국사를 정통으로 공부했다는 그가 왜 이리 어처구니없는 오판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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