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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사전

왕흠약(王欽若)

by 한량 taeshik.kim 2018. 3. 9.

왕흠약(王欽若. 962~1025)은 자(字)가 정국(定國)이며 북송(北宋) 신유(新喩) 출신이다. 신유는 지금의 新餘東門王家 자리다.


18세에 《평진부론(平晉賦論)》을 지어 문명을 떨쳤고, 북송 태종(太宗) 순화(淳化) 3년(992)에 실시된 순화 진사 갑과(淳化 進士 甲科)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거쳐 재상인 동평장사(同平章事)에까지 관직이 이르렀다. 


경덕(景德) 원년(1004) 거란(契丹)이 내범(來犯)하자, 당시 북송 황제 진종(眞宗)은 적을 두려워하여 왕흠약과 진요수(陳堯수) 등의 大臣들이 내놓은 계책을 받아들여 남조(南逃)로 천도하려 했으나 당시 재상(宰相) 구준(寇準. 961~1023)이 힘써 중의(衆議. 여론)를 배척하여 진종에게 단주(州. 지금의 하남<河南> 복양<陽>)에 이르러 독전(督戰)케 하니, 송나라 군대는 사기(士氣)가 대진(大振)하여 결국 “단연지맹(淵之盟)”을 맺게 되었다. 이 맹약을 통해 북송은 굴욕적이긴 했지만 사직을 강화가 성립됨으로써 사직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덕 3년(1006)에 구준의 정적인 王欽若은 眞宗에게 이렇게 도발함으로써 진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淵之役, 陛下不以爲恥, 而謂準有社稷功, 何也?……城下之盟, 《春秋》恥之. 단淵之擧), 是城下之盟也. 以萬乘之貴而爲城下之盟, 其何恥如之!”


이런 설득에 진종은 결국 寇準을 멀리하게 되고 나아가 그를 재상 자리에서 면직케 하고는 지방관으로 좌천시켰다. 


왕흠약은 천하의 간신으로 꼽히거니와, 이런 그의 행적에서 압권을 이루는 사건이 이른바 “天書”의 조작이라. 천서란 하늘이 내린 글이라는 뜻으로, 쉽게 말하자면 있지도 않은 상제(上帝)께서 강림하시어 지상의 황제인 진종을 보고, "야, 너 정치 잘 한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더욱 많은 복을 내려주리라." 뭐 이 따위식 내용이 적힌 글을 조작한 것을 말한다.


자고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중국 역대 황제가 꺼내든 카드가  태산(泰山) 봉선(封禪)이었으니, 천서가 내려왔다는 조작을 이용해 왕흠약은 진종과 짜고서 황제로 하여금 태산 봉선을 단행케 했다.


하지만 이런 행태는 이미 당시 사람들에게 조롱을 한껏 사게 되니, 당시 사람들이 흠약을 일컬어 말하기를 “五鬼”의 한 사람이라 했다. 


하지만 흠약은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도 없으며, 지워져서도 아니될 大 족적을 남겼으니 <<책부원구>> 편찬이 그것이라.


흠약은 楊億, 진팽년 등과 함께 《冊府元龜》 1천권을 편찬해 황제에게 바치니 여기서 책부(冊府)란 고대 황실의 장서책(藏書冊)을 소장한 도서관이라는 뜻이며, 원구(元龜)란 글자 그대로는 큰 거북이라는 뜻이니(元에는 大라는 뜻이 있다), 귀감(龜鑑)을 의미한다. 


註 : 저 인용문을 옮기자면 "단연의 일을 폐하께서는 부끄럽다 여기지 않으면서 구준이란 자가 공로를 세웠다 하니시, 이 어찌된 일입니까? 단연의 일은 성하의 맹약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만승의 고귀함으로써 성하의 맹약을 하시다니 이 어찌 치욕스런 일이 아니리요"라는 정도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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