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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 신동훈 & 김태식/1-외치 이야기

[외치이야기-16] 미라의 저주? - 1

by 초야잠필 2025.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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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가 순동시대 사람임을 처음 밝힌 콘라드 스핀들러는 비교적 일찍 사망하였다 (2005년).

그의 죽음을 미라의 저주와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도 사실 이 일을 하다 보면 꼭 미라의 저주 이야기에 대한 질문을 자주 듣는다. 

글쎄. 필자의 기억으로는 지금까지는 미라의 저주라고 부를 만한 일이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라 보고가 워낙 센세이셔널 한 뉴스이다 보니

미라와 관련된 언론 보도가 나가는 날은 하루종일 뭔가 뒤숭숭한 것은 사실이다.

미라의 저주는 서구사회에도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거리이다. 

아마도 미라의 저주에 관련하여 가장 처음 나온 이야기는 투탕카멘 왕릉을 발굴한 카터 발굴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워드 카터. 투탄카문 왕릉의 발견자

 

카터 발굴단 사람들은 발굴 직후 비명에 간 사람이 꽤 있다.

이를 호사가들은 투탄카문 왕릉에 써있었다는 저주의 문구와 관련하여 엮어 보기도 한다.

여기서 누가 어떻게 세상을 떴는지 한 번 보자. 

George Herbert, 투탄카문 발굴의 스폰서. 무덤문이 열린지 7일만에 모기에 물려 사망. 

George Jay Gould I, 투탄카문 왕릉 방문객. 방문후 열병으로 1923년 5월 사망. 

Prince Ali Kamel Fahmy Bey of Egypt 1923년 7월 아내가 쏜 총에 맞아 사망. 

Sir Archibald Douglas-Reid, 방사선의학자로 투탄카문 미라를 방사선 촬영. 1924년 1월에 불명의 질환으로 사망. 

Sir Lee Stack, 수단 총독. 1924년 11월 카이로에서 암살 됨. 

A. C. Mace, 발굴대원. 1928년 비소중독으로 사망. 

Captain The Hon. Richard Bethell, 카터의 개인 비서. 1929년 사망. 
 
사망자 리스트를 보면 아주 짧은 기간에 이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이 연달아 쓰러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리스트에는 없지만 앞에 언급한 George Herbert (투탄카문 발굴의 스폰서)는 함께 발굴에 참여했던 다른 형제들도 비슷한 시기에 죽어 투탄카문 왕의 저주설에 기름을 부었다. 

이런 사건들이 얼마나 저주라고 부르기에 그럴듯 했던지 최근에는 "이것은 저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저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술논문까지 나왔다. 


미라저주라는 게 있긴한 건가 하는데 관련된 논문. 결론은 그런 것 없다이다. BMJ (British Medical Journal)라는 꽤 좋은 저널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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