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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위청 무덤에서 유철을 등지고

by taeshik.kim 2021.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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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위청衛靑(?~BC 106) 무덤 정상에서 한漢 무제武帝 유철劉徹 능을 백댄서 삼아 박았다.

구릉 정상엔 누군가 다녀간 흔적 한 무더기를 남겼더라.
유철이 주도한 흉노 복수전은 전쟁 영웅의 탄생을 알렸다.

그 선두주자가 위청.

그런 그도 밀려나는 장강 물결처럼 뒷방 뇐네가 되었다.
권력은 점점 조카 곽거병霍去病(140~117 BC)에게로 옮아갔다.
위청 집 문전엔 파리가 날리더니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곽거병의 권력도 그의 변변찮은 이복동생 곽광霍光(?~BC 68)의 그것에는 미칠 수 없었다.

 

이걸 보면 무제 유철 무덤 기준으로 동북편에 위치하는 세 사람 묘 중에서 중간을 차지한 곽거병 묘가 규모가 가장 큰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위청이 가장 크다. 무제 무덤 기준 서북편에 이부인李夫人 능이 위치하는데, 규모가 훨씬 작은 까닭은 그가 정비가 아닌 후궁인 까닭이다. 정비였으면 무릉을 기준으로 왼편 약간 상단에 황제릉과 거의 비슷한 규모로 위치했을 것이다.  



유철이 죽자 상관걸上官桀(?~BC 80), 김일제金日磾(134~86 BC)와 더불어 어린 후사 소제昭帝를 보필하는 고명대신顧命大臣 셋 중 하나가 된 곽광은 소제 사후 유철의 서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가, 그가 개판이라는 판단이 들자 서슴없이 황제를 폐위한 은殷 재상 이윤尹의 고사를 따라, 쿠데타를 일으켜 27일만인가 황제를 폐위하고는 해혼후海昏侯로 격하해서 내친다.

그 창읍왕 해혼후 무덤이 근자에 중국에서 발굴되어 난리가 났다.
곽광은 생평을 전장과 권력투쟁에서 살았다.

고명대신 중 상관걸과 쟁투하면서 그마저 내치고, 김일제까지 사망하자 권력 정점을 구가했으니, 이런 그의 집안도 그의 죽음과 더불어 권력을 시기한 자들에게 멸문지화를 당한다.

그게 인생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다.

그래도 위청에서 곽광에 이르는 저 집안은 한 세대 이상을 구가했으니, 원없이 살았노라 저승에서 외칠지 모른다.

(2018. 2. 8)

 

***

 

중국에서는 대체로 황제 무덤 주변으로 생전에 그를 보필한 주요 신하들 무덤을 쓰는데, 이를 황제를 호위하는 무덤이라 해서 흔히 배장묘陪葬墓라 하거니와, 이를 영어로는 satelite tomb(s)라 옮기곤 하는데, 영어 쪽 표현이 그 성격을 비교적 더 확연하게 드러낸다.

 

덧붙여 이 황제릉 주변으로는 신도시를 하나씩 개발하곤 했으니, 이를 능시陵市 혹은 능읍陵邑과 같은 말로 표현하곤 한다. 

 

황제릉에는 이름이 부여되거니와, 무제 유철이 묻힌 곳을 무릉茂陵이라 한다. 이 무릉 주변으로 배장묘가 120여 개인가 만들었으니, 저 시대 봉사한 신하들 중에서도 위청, 곽거병, 그리고 김일제는 특별대우를 받아 세 곳에 나란히 거대한 봉분을 조성했으니, 생전 지위에 따라 가장 높은 위청, 그 다음 높은 곽거병, 맨꼬바리 김일제 순서로 봉분 크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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