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보면, 아리미쓰가 60여 년이 지나 이 글을 쓰면서 동원한 야쓰이 자료가 그 자신이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본 야쓰이 원자료를 ‘투사(透寫)한’ 것이라고 한다. 투사란 무엇인가? 습자지 같은 것을 놓고 원본을 베끼는 일이다. 간단히 말하면, 모사했다는 뜻이다. 과연 그가 동원한 자료는 원자료를 모사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소장 중인 원자료라고 본다. 더욱 간단히 말한다. 아리미쓰는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있던 야쓰이 자료 원본을 들고 갔다. 저 글에서 ‘투사’했다고 쓴 까닭은 그런 원본 자료를 빼돌린 데 대한 불법 행위를 감추려는 저의에서 동원한 교묘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뒷받침하는 방증자료가 또 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라 아리미쓰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 저와 같은 미공개 총독부 원자료를 이용해 식민지시대 조선의 고고학 조사 자료를 정리한 것이 꽤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겠는가?
그는 틀림없이 1946년 귀국할 때, 혹은 그 이전 조선총독부에 재직하면서 습득한 원 자료들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나아가 그는 야쓰이가 남긴 능산리 고분군 실측도를 ‘투사’했다고 했지만, 실측도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되는 자료 일체를 빼돌렸다. 그것은 무엇보다 야쓰이가 능산리를 조사할 때 동행한 조사원 세 사람을 실명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은 야쓰이가 직접 작성한 《대정6년도 고적조사보고》 해당 부분에는 실명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느닷없이 아리미쓰는 그 세 사람이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노모리 겐(野守健)이라고 공개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야쓰이의 능산리 조사 자료 일체를 아리미쓰가 빼돌렸다는 뜻이다.
(2017. 1. 13)
***
문제는 도면이다. 도면을 습자했다지만 원본이다. 저놈은 자료를 들고 튄 놈이다. 가져가도록 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저런 놈을 아직도 박물관 주변에서는 신처럼 여기는 풍조가 있다.
도적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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