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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論時論

이완용, 친일로 가둘 수는 없다

실은 아래 2003년 8월 13일자 내 기사에서 다룬 문건은 내가 언젠가는 논문으로 쓰겠다고 하다가 결국 손도 대지 못했다. 

이후 누군가가 쓰지 않았다면 다시 시도할 욕심이 난다. 


기사에서도 엿보이겠지만 이완용은 친일파다. 그래서 나쁜놈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전연 저 문건의 의미를 풀지 못한다고 나는 본다. 

그것을 뛰어넘어 이완용을 바라보아야, 식민지 조선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역학 흐름이 보인다고 나는 본다. 


'한일합방기념' 그림엽서. 왼쪽부터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부 초대총감,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 총리대신 이완용.



이완용이 창덕궁을 천황의 이궁으로 만들자...이렇게 하자 그러면 일본정부나 총독부가 열라니 좋아할 거란 믿음이 있다. 

우리의 역사교육, 친일론은 바로 이에서 기반한다. 


하지만 아래서 보듯이 실상은 전연 딴판이다.    


이완용은 이완용 나름대로 살길과 기존 지분을 확보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게 마련이다. 식민당국이나 일본정부에서도 그의 이런 움직임이 신경쓰이기만 한다. 


역사는 연망networking의 집적이다. 

이완용은 창덕궁을 천황의 별궁으로 삼자는 의견을 총독부를 거치치 않고 일본 수상한테 직접 제출했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총독부가 발칵 뒤집혔다. 


"이 놈이 감히 내지 정부와 직거래를 해?"


이 제안은 단순히 이것 이상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총독부는 이를 봉합하느라 난리가 났다. 본국 정부에 낸 의견은 추리면 이랬다.


"그래되면 X됩니다. 조선이 들고 일어납니다." 


그러면서도 총독부는 이완용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좌로부터 이완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친일파? 나쁜놈? 착취? 억압? 반항?

이런 이분법이 지배하는 한, 식민지 역사를 재구성할 수가 없다. 내가 기존 역사학을 환멸하는 이유다. 


더불이 이참에 지적하고픈 것 중 하나가 친일파는 나라 팔아쳐먹고 호의호식했다는 통념이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너가 친일파 해봐라..호의호식하는지. 하루하루가 살얼음이었다." 


다시 정리한다.   


이완용이 조선총독을 제껴버리고 식민모국과 직거래를 시도한다. 내각총리 앞으로 직접 편지를 보내 창덕궁을 천황 이궁離宮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식민지 사정에 어두운 식민모국 정부에서는 귀가 솔깃한다. 그리하여 내각총리대신이 조선총독한데 이렇게 편지를 쓴다. 


"이완용이가 이런 제안을 했는데 아주 괜찮게 보입디다. 준비 좀 해 보시오" 


1907년 한국을 방문한 일본 황태자 후에와 기념 촬영한 각료들. 우로부터 이등박문, 한사람 건너 영친왕과 일본 황태자가 보이고 뒷줄에는 친일파인 조중응과 이완용(네번째)과 송병준이 보인다.



종래의 한국 근현대사는 그래서 이완용은 나쁜놈이었다. 아니, 더 나쁜놈이었다. 생평을 친일로 점철한 삶을 산 이완용 친일행적에 이런 극악무도한 친일행적 하나가 추가됐다. 


이걸로 기존 한국역사학은 끝냈다. 


하지만 이에서 우리가 다시금 주목할 대목이 한데 정작 조선총독이 길길이 반대하고 나선다는 것이다. 


"완용이가 그런 제안을 했어요? 이 상놈이?"


조선총독이 왜 반대했겠는가?

이완용은 왜 직거래를 시도했던가?

배제된 조선총독은 이완용을 어떻게 처리할까?


내가 생각하는 역사연구는 이런 의문들을 해명하는 일이라고 본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역사연구 한 대안은 그렇다는 뜻이다. 


2003.08.13 06:00:01

<8.15특집> 이완용,창덕궁 日황실 헌납.·별궁 요청①

3.1운동 직후 조선총독에 두 차례 거푸 건의 

 

(※ 편집자주 =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 광복 58주년을 맞는 오늘날도 일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한일관계는 여전히  `과거청산'과  `현실 외교'라는 두 축사이에서 적절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들어 친일행위의 불가피성과 일제의 경제발전 기여를 옹호하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는가하면 이는 일본 식민지배를 미화시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우려의 소리도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는 학자및 예술가들의 다양한 견해를 통해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짚어보고 일본 지배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관점을 환기시키는 <8.15특집> 10건을 송고한다. 이 특집에서 친일파 거두인 이완용이 창덕궁을 일본 황실의 별궁으로 적극   건의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자료와 함께 처음 공개한다.) 


1921년, 대정大正 10년 7월 8일자로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발송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조선총독 문건 전문. 이 문건은 이완용이 창덕궁을 일본 천황을 위한 별궁別宮으로 만들자고 거푸 두 번이나 요청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완용의 두번째 요청 문건을 일본어로 번역해 전문을 붙여놓았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일병합'에 앞장 선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李完用.1858-1926)이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에 거푸 두 번에 걸쳐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당시 조선총독에게 조선왕궁 중 하나인 창덕궁을 일본황실에 헌납해 이를  이궁(離宮), 즉, 별궁(別宮)으로 만들자고 요청했던 것으로 13일 밝혀졌다.


또 이완용의 이러한 거듭된 요청과는 별도로 조선에 별궁을 만들고자 했던 총독부는 그곳이 창덕궁으로 확정될 경우 이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오히려 총독이 앞장서 반대하며 다른 곳에 별궁을 세우자고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일본 근현대사가 박환무(50) 인하대 강사가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소장된 식민지시대 일본정부의 문서철인 '공문잡찬'(公文雜纂) 중 '청원'(請願)  류 권25에서 사이토 총독이 1921년 7월8일자로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보낸 문건을 찾아내 공개함으로써 확인됐다.


'秘'(비), 즉 '비밀'로 분류된 이 문건은 '경성(京城)에 이궁(離宮)을 설정하는 건(件)'이라는 제목 아래 이완용이 창덕궁을 일본 황실에 헌납하고 천황가의 별궁으로 만들자는 건의를 1920년 겨울과 1921년에 연이어 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이 문건은 이완용이 두번째로 사이토 총독에게 올린 건의서 내용 전문을 일본어로 번역해 싣고 있다.


이 문건에서 이완용은 새로운 별궁을 만든다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  또한 오래 걸리는 일임을 지적하면서 당시 창덕궁에 거주하던 순종을  아버지  고종이 살던 덕수궁으로 옮기는 대신 창덕궁을 별궁으로 개조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사이토 총독이 수상에게 보낸 이 문건에서 이완용은 이 제안이 "하나의  일로써 두 개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계획"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완용은 이를 위해 먼저 창덕궁을 황실에 헌납하자고 하면서 "(창덕궁이) 이궁으로는 불충분하겠지만 재래(在來)의 궁전이므로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완용이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것은 총독부가 이미 조선에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족들이 조선에서 머무르며 숙박할 수 있는 별궁 건설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미리 파악한데서 비롯된 대응 움직임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완용의 이런 요청에 대해 사이토는 "창덕궁을 이궁으로 전용하고 싶다는 의견은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하면서 서울 장충동에 있던 옛 통감 관저를 고쳐 별궁으로 쓰자고 제안했음을 이 문건은 전하고 있다.


데라우치를 비롯한 「조선총독의 일기」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이 자료를 발굴한 박씨는 "당시 조선총독부는 3.1운동으로 홍역을 치른 직후 소위 '문화통치'를  표방할 때였으니 이런 상황에서 창덕궁을 별궁화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taeshik@yna.co.kr 

(끝)


2003.08.13 06:05:06

<8.15특집> 이완용 문건 전문②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일본 근현대사가 박환무 인하대 강사가 13일 공개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조선총독 문건은 1921년(대정<大正> 10) 7월8일자로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발송된 것이다.


이 문건은 이완용이 조선왕궁 중 하나였던 창덕궁을 일본 천황을 위한  별궁(別宮. 문건에는 이궁<離宮>이라 표현)으로 만들자고 거푸 두 번이나 요청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완용의 두번째 요청 문건을 일본어로 번역해 전문을 붙여놓았다.


자료를 발굴하고 공개한 박씨가 옮긴 이 문건 전문은 아래와 같다. 


1921년, 대정大正 10년 7월 8일자로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발송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조선총독 문건 전문. 이 문건은 이완용이 창덕궁을 일본 천황을 위한 별궁別宮으로 만들자고 거푸 두 번이나 요청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완용의 두번째 요청 문건을 일본어로 번역해 전문을 붙여놓았다.이는 남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秘로 분류했다.



    대정(大正) 10년 7월8일


    조선총독 남작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조선총독印)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 전(殿) 


    경성(京城)에 이궁(離宮)을 설정하는 건(件) 


    경성에 이궁을 설정하시고 싶다는 일에 관해 작년 겨울 후작 이완용으로부터 건의가 있어 당시 상경 중이던 미즈노(水野.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말함) 정무총감에게서 그 건의서 역문(번역문)을 진달(進達. 받은  것을 다시 상부에 올림)해 두었습니다만, 이번에 다시 별지와 같이 동인(同人. 이완용)으로부터 신청이 있으므로 역문을 첨부하여 진달합니다. 그런데 창덕궁을 이궁으로 전용하고 싶다는 의견은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것 같이 사료되었으므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고 이전부터 구두로 비견(卑見)을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것(옛 통감 관저)을 건축한 이래 황족(皇族) 분이 내림(來臨)하셨을 때 한두 번 숙박하신 이외는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보존해 오고 있습니다. 옛 통감  관저를  이궁으로 정하시게 된다면 우선 조금 수선하고 새로 단장하여 이궁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차제에 시급히 결정하시기를 희망합니다. 


    이상 이(완용) 후작의 의견을 진달함에 즈음하여 아울러 구신(具申. 상세히  아룀)합니다. 


    (秘)(비밀문건이라는 뜻)


    역문 이궁을 경성 내에 꼭 조영하시고 싶다는 일에 관해서는 지난번에 서면으로 기록하여 제출한 적이 있었던 바, 각하께서도 찬성하시는 의도가 있다는 말씀을  전해들은 것은 국가를 위해 만행(萬幸. 매우 다행한 일)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미 찬성하시는 이상에는 시일이 시급함을 요하는 것이겠지만, 이궁을  신축하는 일은 도저히 1-2년 사이에 준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속합니다.  우견(愚見)으로는 하나의 일로써 두 개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계획이 있으므로 걱정을 무릅쓰고 감히 아래와 같이 개진하오니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절망(切望.간절히 원함)합니다.


    이왕직(李王職)의 경제에 관해서는 항상 배려하시고 있는 바, 창덕궁은 광활 굉대(宏大)하고 이 때문에 무용하게 사용되는 돈이 많음을 알 수 있고, 한편 덕수궁은 그 건물(규모를 의미?)에서 논하지만 적당하고 또 구내의 석조전과 같은 것은  수십 년 전에 백만 원의 거액을 들인 화려한 양관(洋館)으로서 황족의 궁전으로 어울리는 것이므로 이왕(李王) 전하(순종을 말함)께서 이곳으로 천거하신다면 이왕직의  경제도 영원히 완전할 수 있고 이렇게 하여 창덕궁은 이를 황실에 헌납하신다면 그 건물은 이궁으로서 불충분하겠지만 재래(在來)의 궁전이기 때문에 지장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우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감히 미루어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자연히 천거 건에 관해서는 아직 용훼(容喙. 말참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정 10년 월 일 이완용 재배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각하 

    taeshik@yna.co.kr 

(끝)


2003.08.13 06:10:07

<8.15특집> '이완용 문건'에 드러난 식민지 정치역학③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일본근현대사가 박환무 인하대 강사가 공개한 1921년 '이완용 관련 문건'은 일본천황(가) 별궁(別宮)을 어디에다가 세울 것인가를 두고 이완용-조선총독-일본 내각총리대신의 3자 사이에 전개된 식민지시대 '정치역학'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조선총독이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보낸 이 문건은 골자가 이렇다. 


'한일병합'에 앞장 선 친일파 거두 이완용李完用이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에 거푸 두 번에 걸쳐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당시 조선총독에게 조선왕궁 중 하나인 창덕궁을 일본황실에 헌납해 별궁別宮으로 만들자고 요청한 문건.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소장된 식민지시대 일본정부의 문서철인 공문잡찬公文雜纂 중 청원請願류 권25에서 사이토 총독이 1921년 7월 8일자로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보낸 문건이다.



"후작 이완용이 최근에 두번이나 거푸 창덕궁을 별궁으로 만들자고 하는데, 저 사이코는 이럴 경우 여러 문제가 예상되므로 창덕궁보다는 옛 통감관저를 별궁으로 개조했으면 하니 총리는 이에 대한 결정을 시급해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이 문건은 이완용이 두번째로 조선총독에게 냈다는 건의서를 실었다.


박씨는 이 문건에서 1919년 고종 사망과 장례식.3.1운동, 그에 따른 '문화통치'와 이러한 '새로운' 시대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이완용 등의 '친일의 정치학'을 비롯한 다양한 시대적 컨텍스트(context.문맥)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문건을 볼 때 우선 이완용-조선총독-일본수상 3자는 조선에 별궁이 필요하다는 인식에는 모두 공감한다. 하지만 그 목적과 접근방식은 각기 다르다.


문건 자체로는 명확하지 않으나 하라 수상 또한 이완용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이토 총독이 다른 사람을 보내 구두를 통한다거나, 정식 공문서를 통해 하라 수상에게 이 문제를 여러 번 보고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하라가 이완용의 제안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하라는 왜 이완용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을까? 


박씨에 따르면 하라는 식민지까지 확대한 일본제국 실현을 주장하는 '내선 연장주의자'였다. 요컨대 조선인 또한 일본신민과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줌으로써 더욱 철저하며 영구적인 조선지배를 획책, 완성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 대한제국 정궁인 창덕궁을 천황 별궁으로 개조한다는 것은 이러한 '내선 연장'을 어쩌면 완결하는 표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사이토는 전혀 달랐다. 문건이 증명하듯 그는 그럴 경우 야기될 수 있는 문제점을 들어 창덕궁 별궁 안을 반대했다. 그렇다고 그가 별궁 자체를 반대한 것은 결코 아니다. 누구보다 별궁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창덕궁 대신 옛 통감관저를 제안하고 있다.


왜 통감관저일까? 통감 후신인 총독은 조선의 실질적 '군주'였다. 이러한 정치공간을 별궁화함으로써 사이토는 그 자신의 정치적 위상 또한 높이고자 했다.


이쯤이면 이완용이 수행한 역할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음이 드러난다. 조선총독과 내각총리대신을 교묘하게 오가는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셈이다. 특히나 별궁에 관한 한 이완용은 총독에게 대단히 부담스런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이완용은 이처럼 3.1운동 직후 전개된 '문화통치'와 '내선 연장주의'라는 흐름을 나름대로 분석하면서, 거기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대담한 '창덕궁 별궁안'을 조선총독부와 일본 내각에 동시에 던진 셈이다.


이런 방법으로 어쩌면 이완용은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초래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그 이전과는 또 다른 친일'을 향한 길을 개척하고 있었던 셈이다.

taeshik@yna.co.kr 

(끝)


2003.08.13 06:20:10

<8.15특집> '이완용 문건'에 담긴 대한제국의 비극④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 조약 발표와 동시에 '대일본제국'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은 이에 즈음한 조칙(詔勅)을 발표한다.


이 조칙은 '대한제국'을 '이왕가'(李王家)로 봉(封)하는 한편 그 군주인 순종을 '황제'에서 격하시켜 '이왕가 왕'으로 책립(冊立)한다. 


이 당시 순종은 창덕궁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 창덕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메이지천황은 순종을 책봉하여 일컫기를 '창덕궁 이왕(李王)'이라고 했다.


이 무렵 순종 아버지인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강제퇴위된 뒤 덕수궁에서 살고 있었다. 고종은 재위 당시에는 '황제'를 칭했으니 퇴위 뒤에는 '상황제'(上皇帝) 혹은 '태황제'(太皇帝)로 일컬었다.


메이지천황은 이러한 '태황제' 고종을 이왕가 '상왕'(上王)으로 책봉했다. 한데 고종이 머물던 곳이 덕수궁이었으니 '덕수궁 상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2일 공개된 1921년 '이완용 관련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조선총독 문건'은  이러한 대한제국 비운의 역사가가 숨어있다.


이 문건을 보면 이완용은 창덕궁을 일본황실의 별궁으로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당시 이곳 주인인 순종, 즉 '창덕궁 이왕'은 어떻게 될까?


앞 사진들과 같은 사안에 속하는 문건



이완용은 말한다. 순종을 덕수궁으로 천거(遷居)케 하면 된다고. 순종을 창덕궁에서 몰아내 덕수궁에 '모셔다' 놓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는 것이다.


사이토 총독에게 이완용이 직접 올린 건의서에서 이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이왕(李王) 전하(순종)께서 이곳(덕수궁)으로 천거하신다면  이왕직(李王職)의 경제 (사정)도 영원히 안전할 수 있고 이렇게 하여 창덕궁은  황실에  헌납하신다면 그 건물은 이궁(離宮)으로는 불충분하겠으나 재래(在來)의 궁전이기 때문에  지장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완용은 경제적 비용 및 시간 절약을 위해  이러한  '대담한' 발상을 들고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에게 이러한 제안 혹은  구상이  가능했던 직접적인 사건은 1919년 덕수궁 주인인 고종의 사망이었다. 


주인이 없어졌으니 이제 덕수궁으로 순종을 옮겨 살게 하고는 창덕궁은  일본황실에 헌납해 이를 위한 별궁으로 재단장을 하자는 것이었다. 요컨대 '창덕궁  이왕'인 순종을 '덕수궁 이왕'으로 만들자는 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일까? 이를 반길 듯하던 조선총독이 반대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총독은 순종을 대한제국 정궁인 창덕궁에서 덕수궁으로 몰아내고, 그곳을  별궁화했을 경우 초래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을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래서 이완용의 제안을 반대했을 것이다.

taeshik@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