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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자기PR은 이렇게...강세황과 원매의 경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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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집안 주요 인물 초상화. 윗줄 왼쪽부터 진주강씨 은열공파 시조 강민첨, 그의 16세손이자 강세황 아버지인 강현, 그리고 강세황. 아랫줄 왼쪽부터 강세황 아들 강인, 손자 강이오, 강세환 증손인 강노.



** 2013년 9월 22일 내 페이스북 포스팅을 글을 약간 손질한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양반 올해(2013년을 말함-저자이자 인용자 추기) 탄신 300주년이라 해서 여기저기서 관련 기념행사를 했거나 하거니와, 시·서·화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는 이 양반, 자기 자랑 증세가 심했으니, 그의 글을 엮은 《표암유고(豹菴遺稿)》를 보건대, 석가재(夕可齋) 이태길(李泰吉)이라는 친구가 금강산으로 유람하러 떠날 적에 그에게 써 준 글이 있으니, 이 글 첫 대목은 이렇다.


내 친구인 석가옹이 중랑(中郞) 원굉도의 유람기를 읽고는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글이 표암의 단편들에 미치지 못하니 볼 만한 게 무에 있겠는가?"라고 했다.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안봐도 비디오다. 나 강세황의 글이 명말 중국 문단의 총아로, 그 명성이 동아시아 세계로 퍼져간 월드스타 원굉도(袁宏道·1568~1610) 글보다 낫다는 자네 평가는 말도 되지 않으니, 앞으로 헛소리하지 말고, 금강산이나 잘 구경하고 오라는 말이 따를 수밖에 없다. 왜 이 말을 했겠는가? 이태길이 표암을 상찬한 말이 어떠한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요, 더구나 그것을 문서화한 것도 아닐진대 굳이 이런 말을 강세황이 남긴 까닭은 자기 자랑을 위한 묘책이다. 뭐, 묘책이라 하지만, 실은 그 의도가 빤히 보인다. 


어제 (페이스북에) 올린 책 사진 중에 지만지 총서에 포함된 《원매(袁枚)산문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09)이 있다. 백광준이라는 분이 번역하고 설명을 단 청대 중기 문단의 기린아 원매(袁枚·1716~1798)가 남긴 글 중에서도 말 그대로 산문만을 골라 번역했다. 이 책에는 원매 글 중에서 '선도봉(仙都峰) 유람기'라는 글을 소개하거니와, 이에 의하면 절강성에 수림이라는 정자를 만들어 정착하고는 딩가딩가 환락생활을 거듭하던 원매가 어찌하여 선도봉이라는 명승을 유람하게 된 곡절을 정리한 것이어니와, 


예정대로 되지 않던 선도봉 구경을 원매가 우씨 집안 사람들과 우연히 알게 되어 마침내 유람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낮에 우씨 집안 사람들과 만나 명함을 던져주고 숙소로 돌아와 머물 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옷을 벗고 잠을 청하려는데 문밖에서 두런두런 사람소리가 들려왔으니 다름아닌 우씨 형제였다. 그는 "헤어진 뒤에 명함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원매 선생이신가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그는 곧 손에 든 등으로 위아래를 비쳐보더니 이랬다. "저희들이 어려서 선생님의 글을 읽고는 국초의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연세가 백수십세가 되어야 할 터인데 지금 신수가 이러하시니 옛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인가요"(49쪽)  


원매 또한 앞서 본 강세황과 똑같은 어법으로 내가 이만큼 유명하다는 말을 한다. 이 증언에서 내가 조금은 의심스런 구석이 있다. 혹여 우씨 집안 사람이 말한 국초 인물이 원굉도 혹은 그 형제들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만 혐의를 두기도 어려운 사정이 있으니, 실은 이런 일이 요즘도 비일비재한 까닭이다. 당장 20년 전 내 글 혹은 기사를 기억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면, 꼭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데, 그 표정 혹은 말투를 보아 "아직도 당신이 살아있느냐"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나는 어떤 식으로 내 자랑을 해볼까나 하다가 이런 식으로 에둘러 본다. 강세황이나 원매의 시대에 페이스북이 있었다면, 저들은 또 얼마나 더 많은 자기 자랑을 늘여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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