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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

by 신동훈 識 2026.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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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조선시대 전공자도 아니고, 

전공과 관련 있는 일을 하다 보니 기웃거리는 문외한에 불과하다. 

다만, 이런 것을 먼저 지적해 두고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누구 눈에나 다 보이지만 아이의 입에서나 그 사실이 먼저 나오는 법이다. 

아래에 필자가 조선시대 역사를 보며 느낀 점을 두 가지만 적고자 한다. 

첫째, 

앞에서도 반복해서 썼지만 우리나라는 근대의 기점에 있어 대략 한 세기 이상 끌어올려 보고 있다. 

필자가 보기엔 우리나라는 서양사의 근세, early modern에 해당하는 시기는 아무리 올려도 영조대 이상으로 올릴 수 없다. 

17세기 효종, 현종? 전부 서양으로 따지자면 중세다. 

숙종대도 마찬가지다. 영조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서양사의 근세에 가까운 징후가 나타난다고 본다. 

소위 말하는 근대의 징후가 뚜렷해지는 시점은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다. 

우리나라 역사기술에서 17세기를 얼렁뚱땅 근대의 징후가 시작되는 기점으로 보는 것 같지만, 근거도 없고, 

무엇보다 이 시기까지 전 국민 절반 이상을 차지한 노비 사역과 자급자족적 경제수준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노비사역은 서양의 노예제와 다르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잘 해봐야 서양의 농노고, 

보기에 따라서는 노비는 농노 수준도 안 되는 사람들이다. 

17세기를 얼렁뚱땅 근대의 기점에 두지 말고 확실히 언제부터 시작되고 변화의 기점을 잡을 것인지 확실히 정해놓고 시작해야 한다. 

필자는 영조대가 정말 많이 변한 시기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우리나라가 정말 많이 바뀌었고 

알다시피 19세기가 되면 노비사역은 거의 무너져 있었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 역사 서술에 있어 특히 조선시대-. 

향촌사족의 역할이 과장되어 있다. 

조선시대 전시대를 통틀어 서울을 중심한 기내 지역의 사족이 주도권을 상실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딱 16, 17세기 경 영남에서 올라온 사족들과 정치를 양분했던 적이 있을 뿐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 기내 사족의 독점 체제였다. 

우리는 조선시대가 향촌에 근거를 둔 사족들의 연합정권 정도로 생각하는 거 같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앞에서 필자가 올렸지만, 현량과조차도 절대 다수는 한양에 거주지가 있었고, 

과거급제자는 절반 가까이가 한양에 살고 있었다. 

지방에 근거를 둔, 향촌 기반의 종가집?

이들이 조선사회를 움직이고 흔든 적은 우리 생각보다 길지도 않았고, 

정작 조선시대 내내 막대한 권력을 휘두른 기내 사족들은 입을 다물고 있는데, 

향촌 사족들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안타깝지만 조선시대는 향촌 사족들의 시대가 아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기내 지역의 사족들이 주인공이었고, 

향촌 사족들은 잘해야 조연, 그것도 안 되면 곁방 차지였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대표적으로 조선사를 볼 때 왜곡되어 전해지는 두 가지 사실들이다. 

그러다 보니 지방의 사족 권력이 너무 과장되어 해석되고, 

또 17세기에 이미 나라가 근대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것처럼 쓰는 소설 같은 역사서도 있다. 

이런 착오는 사실 일차 사료만 진지하게 읽어도 다 논파될 수 있는 문제들인데

왜 이런 뻔한 사실들이 지금도 왜곡의 그림자를 조선시대사에 드리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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