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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피곤해서 누워버린 부처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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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庾公이 일찍이 사찰에 들어갔다간 누운 부처님(1)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 분은 중생을 제도하시느라 피곤하신 모양이군"이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명언이이라 여겼다. 

 

(1) 《열반경涅槃經》에 일렀다. "여래如來께서 등이 아파 사라쌍수 사이에서 머리를 북쪽에 두고 누우셨다. 그런 까닭에 훗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이러한 불상을 그렸다" (世說新語 言語第二) 

 

庾公嘗入佛圖,見臥佛[涅槃經云:「如來背痛,於雙樹閒北首而臥,故後之圖繪者為此象。]曰:「此子疲於津梁。」 于時以為名言. (世說新語箋疏 言語第二) 

 

 

《세설신어世說新語》는 중국 남북조시대 송宋 출신 문사 유의경劉義慶(403~444) 찬撰이어니와, 실상 이 원전은 망실하고 같은 남조시대 양梁나라 유준劉峻, 곧 유효표劉孝標(462~521)가 주注한 판본으로 전해질 뿐이다. 

 

앞 일화 중 

 

(1) 《열반경涅槃經》에 일렀다. "여래如來께서 등이 아파 사라쌍수 사이에서 머리를 북쪽에 두고 누우셨다. 그런 까닭에 훗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이러한 불상을 그렸다." [涅槃經云:「如來背痛,於雙樹閒北首而臥,故後之圖繪者為此象。] 

 

이 대목이 유효표가 본문 이해를 위해 삽입한 설명이다. 이 유효표 주 얘기가 나온 김에, 이 대목만 해도 내가 머리맡에 《열반경涅槃經》이 없어 즉각 확인이 어려우나, 유효표가 인용한 《열반경涅槃經》 구절이 「如來背痛,於雙樹閒北首而臥。] 인지,  「如來背痛,於雙樹閒北首而臥,故後之圖繪者為此象。]인지 내가 자신이 없다. 느낌으로는 전자가 아닌가 하며,  故後之圖繪者為此象라는 구절은 이 《열반경涅槃經》 구절을 인용하면서 유효표 자신이 붙인 설명이 아닌가 한다. 

 

하나 유의할 점은 유효표가 이해한 이 사건 등장 와불은 조각이 아니라 회화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유효표는 유공이라는 사람이 절간에 들어가서 본 와불臥佛은 절간 비름박에 누군가가 그림으로 그려놓은 상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이는 아마도 유효표 당대에 유행한 와불은 조각보다는 회화인 까닭에 대뜸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것이 아닌가 하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유효표의 이해가 잘못됐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니와, 

 

와불

 

다만 그럼에도 《세설신어世說新語》 원작자 유의경이 유공이 봤다는 와불을 그림으로 생각했다고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국불교미술사에서 와불은 매우 드문 편이어니와, 이 역시 인도문화권 혹은 그에서 직접 감발한 서역이나 동남아 문화권의 불교와는 매우 다른 대목이 아닌가 하거니와, 그런 한반도에 요새 들어 드물지 아니하게 와불이 나타나는 전통을 발견할 수 있거니와, 이는 남방불교 세계가 거센 징좌 중 하나로 보아도 좋지 아니할까 한다. 

 

저 본문에 등장하는 유공庾公이란 유씨 성을 지닌 지세 높은 분이라는 뜻이어니와, 이는 세설신서 전후로 등장하는 다른 기록들을 대비해야 그 정체를 알거니와, 그런 맥락 과정 다 탈락케 하고 결론만 말하면 유량庾亮이라는 사람이다. 

 

유량은 누구인가? 庾亮이니 289년에 나고 340년에 향년 52세로 사망한 사람이다. 字는 원규元規라 영천潁川 언릉鄢陵 사람이라, 동진東晉시대 권신權臣이자 외척外戚으로 그의 누이가 곧 유문군庾文君이다. 사마씨 晉 왕조는 중원을 통일했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5호16국의 시대에 중원을 상실하고 313년, 지금의 남경으로 쫓겨내려가거니와, 유량의 생몰년에서 유의할 점은 그 자신 황화 문화권 태생으로 생소한 장강유역으로 도망가야 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와불

 

이들보다 한 세대가 지나면 이미 권토중래에 대한 욕망이 거의 사라지게 되거니와, 유량은 본토는 기억하는 사람이라, 그 자신도 북벌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허무하게 실패하고 분패 속에 눈을 감게 된다. 

 

유량의 시대에 이미 중국 대륙에는 불교가 종교사상에서 우뚝한 흐름으로 차지하거니와, 종래에는 낙양 장안 중심주의가 판치는 까닭에 그쪽에 유입하는 불교를 주류적 위치에서 논했지만, 내가 보건대, 불교가 중국대륙을 침략한 다른 통로로 주지할 곳은 남방을 통한 장강 유역이다. 

 

삼국시대 吳에서는 이미 불교가 완연한 주류로 자리를 잡았거니와, 나는 그것이 북방을 통해 상륙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니와, 아마도 광동성 일대를 중심으로 상륙한 남방 해상 불교가 아닌가 하거니와, 암튼 그렇게 상륙한 장강유역 불교는 유량시대에는 광범위하게 중국사회를 소비하는 그런 전통으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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