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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영조시대 군인한테 비친 당쟁의 폐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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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서원. 지금의 전각들은 2006년 복원한 것들이다. 조선시대 유산은 대원군 서원 훼철령에 망실됐다. 

 

조선 영조시대에 군인으로 출세한 인물로 구수훈具樹勳(1685~1757년)이라는 이가 있으니 무관이라, 무인은 까막눈이 많지만, 그는 문장에 능했다는 장점이 있어 《이순록二旬錄》이라는 책을 남길 정도였다. 

 

본관 능성綾城인 그는 영조 8년(1732)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고, 그 3년 뒤인 영조 11년(1735)에는 통제사로 승진했다. 13년(1737)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7년(1741) 대간이 탄핵함으로써 삭직되었지만 19년(1743) 경기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27년(1751)에는 수원부사가 되었지만, 마침 찾아든 대흉년에 기민은 구제하지 않고는 군정軍丁을 뽑으면서 뇌물을 받았다 해서 탄핵을 받고는 다시 파직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도 다시 빨딱 일어섰으니 29년(1753) 좌포도대장에 임명되어 출세가도를 달린다. 

 

우암 송시열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9》는 괴산 화양서원 경내 만동묘萬東廟에 얽힌 사연을 저 《이순록二旬錄》을 끌어다 소개했으니, 이에서 당시 만연한 사색당파를 이리 정리한다. 

 

 

여기에 거처한 지가 30여 년인데, 산수가 절승이므로 유람하러 오는 길손들을 많이 겪어서 자연히 사색당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양과 행동을 보면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처음 동구에 들어올 때 산천을 두루 돌아보면서 좋다! 좋다! 하고 동洞 안에 들어와서가 반드시 암자의 중을 부르고 서원을 지날 때에는 눈을 부릅뜨고 손을 휘저으며 기침하고 함부로 침을 뱉고 만동묘를 지날 때 공경하고 근신하지 않는 자는 남인이요,

 

동에 들어올 때 산수는 자세히 보지 않고 서원과 만동묘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중들의 허물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서 잔소리를 하며 성가시게 구는 것은 노론이요,

 

동에 들어와서 산수만을 보고 서원과 만동묘를 지날 때 존경하는 뜻은 없으나 그렇다고 너무 거만한 태도도 짓지 않고 바쁘게 지나가는 자는 소북小北이요,

 

동에 들어올 적에 좌우로 산천을 돌아보며 혹 냇가에 앉거나 바위에 기대었다가 서원에 이르러서는 조심스럽게 뜰에서 절하고 서적을 자세히 보며 감탄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만동묘에 이르러서는 처마만 쳐다 보아도 이미 깊은 감회가 일고 전殿 안을 봉심奉審하고 몸을 굽혀서 뜰을 지나 암자에 이르러서는 중들의 생활을 자세히 묻고 밤에는 늙은 중을 불러 담화하면서 산중의 조작을 묻는 자는 소론입니다.

 

 

화양서원 묘정비

 

나는 저 《이순록二旬錄》을 직접 열람치 못했거니와, 근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서원학 시리즈 중 하나인 《노강서원 화양서원》(216~217쪽)에서 인용한 신정일 글을 보았거니와, 이 영감쟁이 어디서 이 구절을 구했는지 새벽부터 전화질해서 호통 치고는 내놓으라 했더니, 본인도 어딨는지 당장 찾을 길이 없다 한다. 

 

《이순록二旬錄》은 한국에서는 원질이 멸실된 듯하고, 오직 일본 아천문고阿川文庫 라는 데만 소장된 것으로 보이거니와,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990년에 복제한 것이 소장된 듯하다. 

 

사색당파 사색당파 하거니와, 그 꼬라지 지금 한국사회에 판치는 무슨 빠니, 무슨 부대니 하는 거랑 하등 진배없다. 조선시대 사색당파를 보면 지금의 대한민국 꼬라지가 그 천상의 판박이임을 본다. 

 

화양구곡華陽九曲 파천巴串

이 빠니 부대니 하는 놈들은 지들 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 하며, 그에 대한 공격은 덮어놓고 불궤不軌한 짓이라 하며, 그네들이 하는 짓은 그 어떤 패악도 정의라고 주장한다. 그 꼬라지가 조선시대 사색당파다. 사색당파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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