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재일기의 필자는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이었지만
한학漢學에 대해 식견이 있는 분이었다.
일기 곳곳에 한시를 남겨 놓고
바쁜 공무 와중에 과거 시험이 있으면 응시하기도 하는 등
공인판 주경야독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 일기 곳곳에 보인다.
이 일기에서 이 분이 부인 외 만나던 여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요즘 글을 쓴 경우도 보는데
일기 전반을 보면 다른 내용도 많은데 왜 하필 여성편력을 이 일기에서 취해 글을 썼을지 모르겠다.

이미 돌아가신지 백년이 넘어 지낸 분이라도 이런 측면의 글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편력 연구하라고 일기가 공개된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각설하고,
이 분의 일기를 보면, 구한말 이미 양반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장기인
문자식견은 그 희소성이 그 당시 소멸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중인이 공인이라는 자기일 하면서도 이 정도 문자 식견을 갖추는데
그렇게 되면 양반은 도대체 어디에서 쓰임새를 찾아야 하겠는가.
학계에서 19세기 모칭 유학에 대한 언급을 보면
일자무식한 사람들이 유학을 칭하며 군역에나 빠지려고 했다는 투의 기술을 보는데,
19세기 모칭 유학의 대부분은 아마 하재일기의 지선생 같았을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모칭 유학이라고 해서 문자식견이 없겠는가.
천만에.
그 사람들도 일단 유학 칭한 이상 기본적인 문자 식견은 다 뗐고
붙건 안붙건 나라에서 하는 과거에도 8대조 학생의 호적을 들고 응시했을 것이다.
하재일기 당시 중인이었던 지규식 선생 글을 보면
1890년대 당시 도대체 양반은 무엇을 근거로 중인들과 평민들에 대한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는가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에 그나마 내세울수 있었던 문자식견, 도덕관, 세계관 등
여러 가지는 더 이상 평민 중인들과 차이가 없고
아마도 집안 대대로 양반을 누려왔다는 것 하나만 달랑 수중에 남았을 가능성이 많은데
1894년의 동학혁명
동학군에 투신한 사람들도 당연히 문자식견 다 갖춘 사람들로
양반과 지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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