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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화랑, 그 설치와 폐지와 부활의 변주곡

소위 모본 화랑세기


1. 신라의 독특한 제도인 화랑花郞은 진흥왕 때 창설되었으니 이 화랑은 그가 이끄는 일군의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집단의 우두머리를 지칭하거니와

2. 그를 일러 화랑花郞이라 하기도 하고 풍월주風月主라고도 하며, 국선國仙이라고도 했으니, 이 차이가 무엇인지 애매했거니와 그럼에도 종교 성향으로 보건대 풍월주와 국선은 말할 것도 없이 그가 도교 오두미교 천사도 계통임을 명칭으로써 안다.

3. 한데 이런 화랑은 전신이 있어 남자인 화랑에 대비되어 여성이라 그를 원화原花라 했다. 이 원화가 두 명이었는데 질투가 심해 서로 머리 끄댕이 잡고 쌈박질하다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청부 살인하고는 시멘트에 묻어버렸다.

4. 이 사건이 폭로되어 이에 열받은 진흥왕이 여자는 안되겠다 해서 남자로 하자 해서 그를 세우고는 이름하기를 화랑이라 했다.

5. 이런 화랑이 부침이 있기는 했겠지만 신라가 망할 때까지 있었다.

토우장식장경호


예까지가 팩트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종합한 거부할 수 없는 팩트다.
한데 세부로 들어가서는 여러 불협화음이 노출하거니와,

무엇보다 설치 시기가 착란이다.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이 그 시기를 진흥왕 말년인 그 재위 37년, 576년이라 적기했지만, 이는 문제가 적지 않아 다른 무엇보다 그 이전에 이미 사다함이 화랑으로써 대가야 반란 진압작전에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운 시점이 561년 혹은 562년 무렵인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삼국유사》는 576년 화랑 설치가 오류라고 못을 박은 것이며, 이것이 실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오늘에 이른딘.

이런 지지에 김부식과 《삼국사기》는 아주 등신이 되어 버렸다. 등신..지 스스로 착란을 일으켰다고 삿대질을 해댔다.

그렇다면 화랑 설치는 언제인가?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는 그것이 명확해 진흥왕 즉위 원년 540년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해에 풍월주를 설치했다고 하는 까닭이다. 

남당 박창화


이렇게 되니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 즉위할 때 진흥은 일곱살 꼬맹이라, 그 어미 지소가 태후로 국정을 농단했다.

따라서 화랑 설치 주체는 진흥이 아니라 지소태후가 된다.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그 전신 원화다. 이리 되면 원화는 설치 시점이 법흥왕 혹은 그 이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일련의 착란, 혹은 전개를 어찌 풀 것인가?

아무도 못 풀었다. 

불후의 책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그러다가 화랑세기가 출현하면서 모든 착란이 봄날 눈 녹듯 사라졌다.

첫째 화랑 전신 원화는 법흥왕 때 창설되었다.
둘째 그 원화가 머리 끄댕이 쌈박질로 법흥왕 때 해체되었다.
셋째 그것을 대체한 화랑은 이미 싹은 법흥왕 시대이고 그것이 법적으로 정비되어 공식 출범한 시점이 진흥왕 원년이다.
넷째 이를 만든 주체는 지소태후다.
다섯째 초기 화랑들 주요 역할은 젊은 과부 지소태후를 위한 밤 봉사였다. 코피 날 때까지 태후를 모셨다.
여섯째 따라서 화랑은 출발이 호스트바였다.

일곱째 그런 화랑이 그런대로 굴러가다 일대 평지풍파가 일어 미실이라는 요망한 여인이 나타나 진흥왕을 등에 엎고 화랑을 폐지하고 원화를 부활하고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여덟째 쫓겨난 풍월주 화랑이 설화랑이라, 그 역시 미실의 남자이기도 했다.

아홉째 그러다가 미실이 초대형 사고를 친다. 동륜 태자 치정 사건에 얽혀들었다가 태자긴 아버지 후궁을 건딜어 밤중에 담장 타고 넘다가 사냥개한테 물려죽는다. 조사결과 미실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 원화에서 쫓겨난다.

열째 풍월주가 부활하고 설화랑이 재취임한다.
그 시점이 바로 576년이었다.

이것이 화랑세기를 통해 드러난 사건 얼개다.

따라서 576년에 화랑이 설치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