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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익재 이제현 묘지명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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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익재 이제현 묘지명이 지난 2008년 개성에서 발굴되었다는 소식 말이다. 이에 기존 문헌들에 실린 그의 묘지명과 북한에서 전한 관련 소식을 정리해 봤다. 


이제현 묘지명은 2008년 이래 개성박물관에 전시 중이라 하는데, 혹 이곳을 방문한 분으로 관련 사진을 갖고 계신 분은 공유를 앙망한다. 북한에서도 그 소식만 전했을 뿐, 그 자세한 판독은 공개하지 아니해서, 기존 묘지명과 어느 부분에서 갈라지고 만나는지 내가 알 수가 없다. 


묘지명은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6과 《동문선東文選》 권126에 실려 있으며, 1376년(우왕 2) 무렵 이색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현 초상



계림부원군 시문충 이공묘지명鷄林府院君謚文忠李公墓誌銘


지정(至正) 27년 정미년(공민왕 16, 1367) 가을 7월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계림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鷄林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 익재(益齋)선생 이공(李公)이 자택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81세이다. 태상(太常)에서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10월에 관리가 의전을 갖춰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병진년(우왕 2, 1376) 겨울 10월 현릉(玄陵 : 공민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공은 이름은 제현齊賢, 자는 중사仲思, 성은 이씨李氏다.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 소판蘇判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수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金溥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 태조太祖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윤홍潤弘을 낳았다. 윤홍이 승훈承訓을 낳고, 승훈이 주복周復을 낳고, 주복이 칭偁을 낳고, 칭이 치련侈連을 낳고, 치련이 총섬寵暹을 낳고, 총섬이 춘정春貞을 낳고, 춘정이 현복玄福을 낳고, 현복이 선용宣用을 낳고, 선용이 승고升高를 낳았다. 승고가 문림랑文林郞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인 득견得堅을 낳았다. 상의가 좌복야左僕射로 추증된 핵翮을 낳고, 복야가 검교정승檢校政丞으로 시호가 문정文定인 진瑱을 낳았다. 문정이 대릉직戴陵直 박인육朴仁育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분이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다. 지원至元 정해년(충렬왕 13, 1287) 12월 경진일에 공을 낳았다. 


公諱齊賢字仲思父姓李氏新羅始祖奕居世有佐命大臣曰李謁平其後蘇判居明生兵部令金現兵部生三韓功臣大守金書新羅王金傅旣納土入朝尙太祖女樂浪公主生女以妻金書生潤弘潤弘生承訓承訓生周復周復生儞儞生侈連侈連生寵暹寵暹生春貞春貞生玄福玄福生宣用宣用生升高升高生文林郞尙衣直長同正諱得堅尙衣生贈左僕射諱翮僕射生檢校政丞謚文定諱瑱娶戴陵直朴仁育之女辰韓國大夫人以至元丁亥十二月庚辰生公. 


2008.02.22 11:47:57

"北, 고려 학자 이제현 묘지석 발굴"<北방송>

"고려사에 없는 내용도..14세기 연구에 의의"


(서울=연합뉴스) 한승호 기자 = 북한이 최근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익재 이제현(1287∼1367)의 무덤에서 묘지석을 새로 발굴했다고 평양방송이 22일 보도했다.


묘지석은 죽은 사람의 이름, 출생과 사망 년월일, 일생의 행적 등을 기록해 무덤 앞에 묻는 표식이다.


평양방송은 이날 전용철 송도사범대학 혁명역사학부 교수(역사지리 강좌장)와 인터뷰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전하고, 묘지석의 발굴 경위와 학술적 의미 등을 소개했다.


전 교수는 "최근 그(이제현)의 무덤을 조사 발굴하는 과정에 무덤 앞의 땅속에서 묘지석을 발견했다"면서 "청석을 잘 다듬어 만들었고 길이 6.68m, 너비 63.2㎝, 두께 20.5㎝, 무게 약 500㎏이나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묘지석은 고려말 이조(조선)초의 우수한 금석문 유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묘지석가운데 규모가 제일 크고 내용도 풍부한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묘지석의 글은 고려시기 이름난 문장가이며 학자인 목은 이색이 지었는데 모든 34줄에 2천745자나 된다"며 "고려사에 없는 내용도 적지 않기 때문에 특히 14세기 고려사 연구에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평양방송은 이 묘지석이 현재 개성 고려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덧붙였다.

hsh@yna.co.kr

(끝)  


공식 보고는 발굴 4년이 지난 2012년에야 이뤄지는데, 발굴 직후 평양방송에 출연해 인터뷰를 했다는 그 친구 전용철 송도사범대학 혁명역사학부 교수(역사지리 강좌장)가 하는데, 《력사과학》 주체 101(2012)년 제3호 상식란에 실린 아래 글이 그것이라 전문은 다음과 같다. 표기는 그대로 두되, 뛰어쓰기에 남북한 차이가 많아 이것만 남한식으로 대체했다. 


덧붙여 이 글 원문 어디에도 한자는 병기되지 아니하지만, 군데군데 보강한다. 





새로 발굴한 익재益齋 리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


묘지墓誌는 지석誌石이라고도 말하는데 죽은 사람의 이름, 출생과 죽은 년월일, 일생 업적 등을 기록하여 무덤에 묻는 표식으로서 보통 돌이나 사기판에 새긴다. 리제현(李齊賢, 1287년-1367년)은 고려 후반기의 대표적인 문학가, 봉건 학자이다. 그는 15살에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1304년에 연경궁록사延慶宮錄事로 임명되였으며 1313년에는 황해도黃海道 안렴사按廉使(어사)로 되였다. 그후 근 30년간 원나라에 가서 고려 봉건정부의 대변인의 역할을 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우정승右政丞,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높은 벼슬을 하였다. 말년에 그는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저술과 창작으로 여생을 보내였다. 그의 문집으로 《익재집益齋集》이 있으며 해방 후 그의 작품들을 번역하여 묶은 《리제현작품선집》이 출판되었다. 그의 시에는 고국에 대한 생각과 민족적 생활풍습에 대한 애착, 조국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긍지가 맥박치고 있다. 또한 당대 사회의 가혹한 현실을 비판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동정을 표시한 내용들이 반영되여 있다. 그는 력사에도 조예가 깊어 《국사國史》, 《금경록金鏡錄》 등을 썼고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수정 보충하였으며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시기의 실록 편찬에도 참가하였다. 그는 1367년 81살로 일생을 마쳤으며 죽은 후 개성부 동북쪽 도리촌桃李村(오늘의 십탄리)에 묻히었다. 주체 96(2007)년 12월 그의 무덤을 발굴조사하는 과정에 무덤 앞의 땅속에서 묘지(지석)를 발견하였다. 지석은 청석靑石(판암板巖)을 잘 다듬어 만들었는데 길이 1.68m, 너비 63, 20m, 두께 20, 5cm이며 무게는 600kg이나 된다. 지석의 사방에 가는 선을 긋고 그 안에 묘지명墓誌銘을 썼는데 한 면에 다 새기였다. 지석의 웃부분에는 전서체篆書體로 《문충공 리씨 묘지명文忠公李氏墓誌銘》이란 여덟 글자의 제목글을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모두 해서체楷書體로 썼는데 제일 첫 줄에는 《고려국高麗國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 리공 묘지명墓誌銘 병서竝序》라고 썼고 둘째 줄에는 《전 중현대부中顯大夫 전교령典校令 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 설경수偰慶壽》가 묘지의 글씨를 썼다고 새기였으며 셋째줄에는 《문생門生 특진特進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 문하부判門下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집현전集賢殿 대학사大學士 령 서운관사書雲觀事 권중화權仲和》가 전액篆額의 글씨를 썼다고 한 다음 왼쪽으로 가면서 묘지명 내용을 새기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묘지명을 지은 사람은 《문생門生 문충보절文忠保節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 중대광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예문관大提學 대제학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지서연사知書筵事 리색李穡》이며 묘지명을 지은 년대는 1375년이고 묘지명을 새긴 사람은 훈곡薰谷 명호明昊, 새긴 년대는 1394년이라고 썼다. 이 묘지는 고려 시기의 금석문 유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리제현 묘지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알려진 지석 가운데서 규모가 제일 크며 내용도 풍부하다. 묘지의 글은 고려 시기의 이름난 문장가이며 학자인 목은牧隱 리색(1328년 - 1396년)이 지었는데 모두 34줄, 2,745자나 된다. 여기에는 《고려사》에 없는 내용도 적지 않으므로 특히 14세기 고려사 연구에 의의가 있다. 또한 고려시기 금석문 연구와 지석의 구조 및 묘지명 작성 형식 그리고 전서, 해서 등 서예연구에도 의의가 있다. 이 묘지는 주체 97(2008)년 1월 개성 고려박물관에 옮겨져 국내외 참관자들의 큰 관심을 끌고있다. (전룡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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