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6차례에 걸쳐 전개된 고려・몽골 전쟁은 고려가 겪었던 직접적인 전쟁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였다.
40여 년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고려 전 국토가 전장으로 이용되었고, 이와 함께 수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해에 몽골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만 6800여명이다. 살육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이 전쟁 기간 동안 가장 극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처인성 전투가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일반 군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받던 처인부곡에서 치러진 이 전투는 관군의 도움없이 순수하게 지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으며, 결국 몽골군의 원수 살리타이(살례탑, 살리타)가 사살되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승장 김윤후가 등장하며, 이 처인성 전투 승리는 결과적으로 고려정부가 몽골에 대항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해주었다.
1231년 8월 1차 침입 이후 고려는 강화를 선택하였고, 이에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몽골에 항전 의지를 보이며 1232년 6월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였는데, 고려 정부의 강화 천도는 대몽항쟁 전개에 중요한 전환 기점이 되었다.
고려 정부의 강화 천도는 몽골 측의 6가지 요구(六事)1 와 고종의 친조(親朝: 고종이 직접 몽골 황제를 배알)를 회피하고 몽골과의 장기전을 대 비하는 것으로 몽골의 입장에서는 노골적인 반역행위로 간주되었고,
몽골은 이를 명분삼아 1232년 8월 살례탑을 원수로 삼아 다시 침공하였다.
1232년 11월 살리타이는 광주산성(지금의 남한산성)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광주부사 이세화(李世華)의 활약 으로 이 일대를 차례로 장악해나가려던 살리타이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광주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살리타이는 새로운 공격 루트를 모색하기 위해 광주도(廣州道)를 따라 내려오다 1232년 12월 16일 드디어 처인부곡으로 남하하였다.
1232년 12월 16일, 지금 양력으로 환산해 보아도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그리고 이 추운 겨울, 처인부곡민들은 김윤후 승장의 지휘 아래 몽골군의 원수인 살리타이를 사살하고,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값진 승리를 얻었다.
우연이겠지만, 2023년 12월 16일(음력과는 다르지만)에 전국에 많은 눈이 내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추위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아마도 1232년 12월 16일의 처인성 전투가 있었던 겨울에도 이렇게 눈이 오지 않았을까?
하얀 눈이 성벽을 모두 덮어버렸다.
오늘처럼 그때도 엄청 추웠을 것 같다.
추위에 떠는 것인지, 두려움에 떠는 것인지 모를만큼.
하얀 눈밭으로 변해버린 처인성을 마주하며, 1232년 12월 16일, 추운 겨울날 처인성의 모습을 잠깐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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