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월드컵은 나로선 내가 기억하는 첫 중계 월드컵이다.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온 때가 내가 호롱불 밑에서 심지 돋구며 국민학교 입학해서 비로소 한글을 깨치기 시작한 무렵이라 기억하니, 1974년 어간이라, 한동안 우리 동네 전체를 통털어 텔레비전은 딱 한 대였다.
우리 집에 언제 텔레비전이 들어왔는지는 확실한 기억이 없다. 얼추 말하건대 저 월드컵이 열릴 적에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해 월드컵과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스포츠사 사건은 한국프로야구 출범이었으니, 그때 출범경기를 나는 우리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내가 어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월드컵이 있는 줄도 몰랐다.
1982년 당시 프로야구 출범에 맞추어 그 촌동네에도 야구 바람이 일었지만, 그래도 축구가 제1 스포츠였다. 그런 축구로 꿈의 무대라는 월드컵이라는 걸 처음으로 집구석에서 생중계로 지켜봤으니, 38년 전 그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해도 단 한 명 또렷이 남는 선수가 있으니 그가 바로 오늘 타계한 파울로 로시 Paolo Rossi 다.
내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 자신은 없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 친구가 조별리그가 끝나고 토너먼트 단계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조별리그 세 경기에 다 뛰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마 출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그가 이른바 16강이니 8강이니 준결이니 결승이니 하는 토너먼트에서 느닷없이 등장해 골폭풍을 이어가며 마침내 이탈리아를 월드컵 챔피언으로 이끌었다는 기억만은 또렷하다. 그가 컵에다가 키스하는 장면도 기억난다.
더불어 당시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대목은 저런 로시가 무슨 사건에 휘말려 대회 직전까지인가 오래도록 징계를 받아 출전치 못했다는것이었다. 분명 나는 이렇게 기억한다.
그런 기억이 맞는지를 확인하고자 1982년 월드컵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보니 얼추 맞다. 38년 전 그 기억에 왜 이리 잘 맞는지 나 자신이 신통방통할 뿐이다.
찾아 보니, 로시는 세리아 아 페루지아 Perugia에서 뛰던 1980, 이른바 토토네로 Totonero라고 알려진 승부조작 스캔들에 가담했다 해서 3년 동안 출전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이 정도면 실상 선수 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나중에 징계기간이 2년으로 단축되긴 했지만 2년도 뛰어야 하는 축구선수한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때 모든 연루자가 주장하는 대로 로시 또한 무죄라 주장하면서 음모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아무튼 이 때문에 1980년 유럽선수권 European Championship 출전이 당연히 무산한 그는 징계기간이 줄어들어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이태리 아주리 군단 일원으로 승선했다. 당시 이태리 감독은 엔초 베아르초트 Enzo Bearzot. 참 감독 배짱도 보통은 아니라 할 만하다.
당시 월드컵 본선은 지금과는 달라 24개국이 4팀씩 6개 조로 나뉘어 각조 상위 2개팀, 그러니깐 12개팀이 다시 3개팀씩 4개조를 이루는 2차 조별리그를 치루어 각조 수위팀 4개국이 준결을 하고 그에서 이긴 팀이 결승에서 맞붙어 패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이에서 이태리는 1차 조별리그에서 폴란드 카메룬 페루와 같은 조에 소속되어 승리 하나 없이 세 경기 모두 무승부만 해서 승점 3점으로 폴란드에 이어 2등으로 턱걸이 해서 2차 조별리그에 진출한다. 이 2라운드 조별리그에서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더불어 죽음의 조를 형성하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디펜딩 챔피언에다가 22세 한창 나이 신성 마라도나가 포함됐으며, 브라질은 소크라테스 Sócrates, 지코 Zico, 그리고 팔카오 Falcão라는 삼두마차가 황금기를 구가하던 중이었다.
그해 6월 29일 바르셀로나 에스타디 데 사리아에서 열린 2라운드 첫 경기에서 어린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를 2-1로 물리치고 첫 승을 기록한 데 이어 7월 2일 같은 데서 열린 브라질과의 준결 진출을 두고 운명의 한 판을 벌이게 된다. 내 기억에는 로시는 이 경기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르겠다. 그 전 경기에 나왔는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이때 느닷없이 등장한다. 것도 해트트릭으로 말이다.
이에서 이태리는 브라질을 3-2로 꺾는다. 로시는 5분 선취골을 넣는 12분에 동점골을 허용하자 25분에 다시 앞서가는 골을 넣는다. 하지만 68분에 파우캉한테 또 다시 동점골을 내주고 팽팽하던 시점, 74분에 결승골을 기록한다. 82년 월드컵이 로시를 위한, 로시에 의한, 로시의 대회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준결에 오른 이태리는 1라운드에서 같은 조에 속해 승부를 가리지 못한 폴란드랑 1982년 7월 8일 바르셀로나 캄프 누에서 붙게 되는데, 2-0 승리로 끝난 이 경기 모든 득점 역시 로시 몫이었다. 그리하여 이태리는 프랑스를 꺾은(이때 프랑스는 미셸 플라티니 시절이었을 것이다) 서독과 7월 11일 마드리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챔피언을 걸고 단판 승부를 펼치게 되거니와, 3-1 이태리 승리로 끝난 이에서도 0-0으로 팽팽히 맞선 57분,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린다.
이에서 보듯이 로시는 결승까지 마지막 세 경기에서만 6골을 몰아넣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는 그 월드컵에서 빛난 유일한 별이었다.
그런 그가 허망하게 향년 62세로 갔단다. 너무 이른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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