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400년 전 노르웨이 어느 어촌 마을 어부들 떼죽음이 부른 마녀재판의 광풍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1. 10.
반응형
17세기 핀마르크Finnmark 마녀 재판witch trials 중심지였던 어촌 마을 바르도Vardo 항공 사진 (Timo Noko,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라이선스). 이 한적한 마을에서 400년 전 집단광기에서 비롯한 집단학살이 있었다.

 
1617년 갑작스러운 겨울 폭풍이 어떻게 노르웨이 역사상 가장 참혹한 마녀 재판을 촉발했을까?

17세기 노르웨이 최북단 지역인 핀마르크Finnmark 에서 벌어진 마녀 재판에서 91명이 처형되었는데, 대부분 화형burning at the stake이었다.

1617년 크리스마스 이브, 북극권Arctic Circle 훨씬 북쪽에 위치한 노르웨이 핀마르크Finnmark에서 선원들은 이전처럼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그때 갑자기 거센 파도와 강풍이 잔잔한 바다를 뒤흔들었다.

폭풍이 그칠 무렵, 배 열 척이 전복되고 40명 남자가 익사했는데, 이는 어촌 마을 바르도Vardo 남성 인구 대다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을 오직 한 가지, 마법witchcraft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이상 기후 현상은 결국 노르웨이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마녀 재판witch trials, 즉 유럽에서 가장 격렬한 재판 중 하나인 핀마르크 마녀 재판Finnmark witchcraft trials 촉매제가 되었다.

이 재판은 17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1692년까지 111명 여성과 24명 남성이 마법을 행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들 중 91명(대부분 여성)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는 노르웨이 역사상 마법죄practicing witchcraft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핀마르크 마녀 재판Finnmark witchcraft trials

핀마르크Finnmark는 어촌 마을과 웅장한 피오르드가 곳곳에 흩어진 험준한 시골 지역이다.

1600년대 초, 약 3,000명 인구가 18,000제곱마일이 넘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으며, 대부분은 바르도Vardo와 키베르그Kiberg 같은 작은 어촌 마을에 거주했다.

당시 핀마르크 지역은 노르웨이 인구 0.8%에 불과했지만, 노르웨이 전체 마녀 재판 16%가 이 지역에서 열렸다고 트롬쇠Tromso 대학교 명예 역사학자인 리브 헬렌 빌룸센Liv Helene Willumsen은 2013년 출간된 책 《스코틀랜드의 마녀와 마녀 사냥꾼들Scottish Witches and Witch-Hunters》에 실린 에세이에서 밝혔다.

역사가 리브 헬렌 빌룸센Liv Helene Willumsen이 핀마르크 마녀 재판에서 처형된 91명을 기리는 스테일네세트 기념비Steilneset Memorial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피에르-앙리 데샤예스/AFP via Getty Images)


마녀 재판은 근대 초기 유럽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대략 1450년에서 175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약 10만 명이 마녀로 고발되었고, 그중 약 5만 명이 화형을 포함한 여러 형벌에 처해졌다. 

(1690년대 초 세일럼 마녀 재판Salem witch trials이 열린 영국과 13개 식민지Thirteen Colonies에서는 교수형이 마녀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이었다.)

노르웨이에서는 총 약 800명이 마녀로 고발되었고, 약 300명이 처형되었다.

이 수치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적다.

예를 들어 독일은 1300년부터 1850년까지 비교적 넓은 기간에 걸쳐 16,000명 이상을 기소하고 거의 7,000명을 처형했다.

노르웨이 사형 집행 건수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종종 간과되는 핀마르크 마녀 재판은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 명예 역사학자 브라이언 레바크Brian Levack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내린 사형 선고 대부분은 세 차례 주요 "공황panics" 기간 동안 이루어졌는데, 각 공황은 피고인이 "다른 마녀들의 이름을 거론하거나 고발"하면서 시작되었고, 이는 일련의 상호 연관된 재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공황은 1620년에서 1621년, 1652년에서 1653년, 그리고 1662년에서 1663년 사이에 발생했다.

많은 재판은 14세기 요새인 바르도후스 요새Vardohus Fortress에서 열렸다.

윌룸센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핀마르크의 마녀 공황witch panics이 극심했던 이유는 당시 이 지역이 노르웨이 전체 마녀사냥의 중심지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모든 악은 북쪽에서 오고, 북쪽 사람들은 마법에 능통하며, 지옥으로 가는 입구는 북쪽에 있다"는 유럽 전역의 믿음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https://youtu.be/x3h6pyWrOq4

 
흑마술Black magic과 악마와의 계약

근대 초기 유럽에서 마녀로 고발된 사람들은 흔히 두 가지 유형의 마법, 즉 악행maleficium (해를 끼칠 의도로 행하는 흑마술black magic) 또는 악마 숭배diabolism로 기소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강력하게 비난받은 후자는 악마와 계약을 맺어 신을 저버리는 행위를 의미했다.

레바크에 따르면, 1620년 이전 핀마르크 지역 마녀 재판은 대부분 개별적이었고, 주로 악행 혐의에 집중되었으며, 기소된 사람은 대부분 사미Sami 족 남성이었다.

사미족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주로 핀마르크 지역에 거주하는 토착민으로, 항해를 위해 강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주술적인 능력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핀마르크에서 마술로 기소된 16명 사미족 남성 중 13명이 결국 처형되었다.

한편, 악마론demonology이라는 이단 교리는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를 포함한 유럽 엘리트층에 의해 널리 퍼졌으며, 이들은 악마론을 비난하는 서적을 출판했다.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초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인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야기가 전해질 때마다 새로운 각색이 더해졌다.

하지만 악마 숭배diabolism 사상이 노르웨이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은 1617년이 되어서였다.

1720년 작, 악마가 마녀들에게 밀랍 인형을 주는 그림 (위키미디어 커먼즈를 통해 공개 도메인)


17세기,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코펜하겐에 기반을 둔 단일 군주 아래 통합되었다.

1588년부터 1648년까지 이 통합을 통치한 크리스티안Christian 4세는 열렬한 마녀 사냥꾼이었다.

1617년, 그는 "진짜" 마녀를 "악마에게 충성하거나 악마와 결탁한 자"로 규정하는 칙령을 발표했다고 빌룸센은 번역했다. 

이 칙령은 이후 1619년부터 1651년까지 핀마르크 지방 총독을 지낸 스코틀랜드 출신 존 커닝엄John Cunningham이 악용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특히 격렬한 마녀 재판으로 얼룩졌으며, 이로 인해 41명이 목숨을 잃었다.

모국에서 계속되던 마녀 박해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커닝햄은 1617년 크리스마스 이브 폭풍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왕의 칙령을 이용해 1620년 핀마르크에서 첫 번째 마녀 공황을 촉발했다.

이 공황으로 12명 여성이 사망했다. 

마녀죄는 입증하기 어려운 범죄였기 때문에 핀마르크 재판에서는 자백과 정황 증거가 유죄 판결 근거가 되었다.

노르웨이에서는 선고 전 고문이 법적으로 불법이었지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흔히 사용했다.

특히 '마녀 수영swimming 시험' 또는 '물 시련water ordeal'으로 알려진 고문 방법이 널리 사용됐다.

이 시험은 피고인을 묶어 물속에 던지는 것이었다.

피고인이 가라앉으면 무죄로, 떠오르면 유죄로 판명되었다.

세례의 신성한 요소인 물은 악마와 거래한 자를 배척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선고 후에는 피고인의 공범자들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고문이 허용되기도 했다. 

마녀죄에 대한 사형은 일반적으로 화형으로 집행되었다.

고고학자이자 핀마르크 전 문화유산국장인 레이둔 라우라 안드레아센Reidun Laura Andreassen은 "불은 영혼을 정화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라고 말하며, "불이 그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믿었다."라고 덧붙였다. 

1620년에서 1621년 사이 마녀 재판 당시 악마 숭배 혐의로 기소된 여성들은 다른 마녀들과 만났다고 자백했다.

또한 동물로 변신하는 능력과 1617년의 치명적인 폭풍을 일으키는 능력 등 초자연적인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공유했다. 

제임스 6세의 마녀 사냥에 관한 논문 《악마론Daemonologie》 표지 (위키미디어 커먼즈를 통해 공개 도메인)


윌룸센이 번역한 법원 기록에 따르면, 1621년 물 시련을 당한 엘세베 크누드스다터Elsebe Knudsdatter는 자신과 동료 마녀들이 "실에 세 개의 매듭을 짓고, 자신은 주문을 외우며 실에 침을 뱉었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했다. 매듭을 풀자 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자백했다.

그녀는 마녀로 유죄 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또 다른 피고인 마리 요르겐스다터Mari Jørgensdatter는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악마가 나타나 자신을 섬기면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요르겐스다터는 폭풍을 일으키기 위해 공모했다고 자백하고 다른 11명을 마녀로 고발했다.

그녀 역시 화형에 처해졌다. 

학자들이 크리스마스 이브 폭풍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주로 법원 기록에서 비롯한다.

17세기 노르웨이에서는, 특히 글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작은 공동체에서는 역사가 구전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빌룸센은 말한다.

"마녀 재판 기록이 매우 귀중하고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정보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무엇을 믿었고 주변 세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습니다." 
 

1555년 독일에서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는 모습을 묘사한 판화. (위키미디어 커먼즈를 통해 공개 도메인)



핀마르크 마녀 재판의 절정

1620년대의 공포는 핀마르크 마녀 재판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특히 여성들이 "훨씬 더 강력하게 기소되었다"고 빌룸센은 말한다.

재판 과정에서 사형당한 91명 중 77명이 여성이었다.

희생자 중에는 미혼 여성도 있었고, 기혼 여성도 있었다.

심지어 어린 소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663년에 최소 6명이 법정에 섰지만, 결국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추세는 유럽 전역의 상황을 반영한다.

유럽 대륙에서 마녀로 처형된 약 5만 명 중 약 80%가 여성이었다.

"왜 여성은 악하고, 나약하고, 복수심에 불타고, 악마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여겨지는 걸까요?" 빌룸센은 묻는다.

"이것이 바로 1만 크로네짜리 질문입니다. 핀마르크에서 목격한 현상이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4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마침표하고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1662년에서 1663년까지 이어진 마녀사냥 공황은 세 차례 공황 중 마지막이자 가장 격렬했다.

이 공황 이후에는 몇몇 개별 사례만 기소되었고, 마녀사냥과 관련된 마지막 살인은 1692년에 발생했다. (사미족 샤먼인 안데르스 포울센Anders Poulsen은 재판 다음 날, 정신이 나간 남성에게 도끼로 살해당했다.) 

바르도후스 요새 항공 사진, 1960년경 (위키미디어 커먼즈를 통해 공개됨)


이 마지막 공포 속에서 마녀로 고발된 여성들은 바르도후스 요새의 이른바 '마녀의 은신처witches’ hole'에 몇 주, 심지어 몇 달 동안 감금되었다.

1663년 4월 고발이 잦아들 때까지 20명 여성이 처형되었다. (이 수치에는 심문 중 고문을 당해 사망한 두 희생자가 포함되며, 이들의 시신은 화형에 처해졌다.)

고발된 마녀들 자백에는 어머니가 맏딸에게 마법 지식을 전수한다는 이야기나 마녀의 몸에 악마 표식이 있다는 이야기와 같은 새로운 악마론적 사상이 만연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학식이 풍부한 점성술사 암브로시우스 로디우스Ambrosius Rhodius와 그의 아내 안네 프리드리히스다터 로디우스Anne Friedrichsdatter Rhodius 부부에게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왕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여성들과 함께 요새에 투옥되었다.

빌룸센에 따르면, 특히 안네는 고발된 여성들에게 새로운 마법 개념을 주입하고 자백을 부추겼다.
"뒷담화를 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 역사학자는 설명한다. "이야기에 뭔가 흥미로운 요소를 덧붙이면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아이디어가 얼마나 빨리 전파되고 어휘에 자리 잡는지 알 수 있죠."

이 부부가 악마론을 퍼뜨린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빌룸센은 그들이 유럽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녀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했다고 믿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로디우스 부부는 사형 선고를 받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도 자신들은 그 운명을 피했다는 것이다.
 

노르웨이 바르도에 있는 스테일네세트 기념비는 핀마르크 마녀 재판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Frankemann via Wikimedia Commons under CC BY-SA 4.0



핀마르크 마녀 재판 희생자 추모

18세기 초에 이르러 마녀 재판은 거의 사라지면서, 약 3세기 동안 만연한 광기와 공포가 종식되었다.

유럽은 계몽주의 시대Age of Enlightenment로 접어들었고, 적어도 교육받은 엘리트층 사이에서는 마녀가 더 이상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핀마르크 마녀 재판은 21세기에 이르러서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1년에 이르러서야 노르웨이 여왕이 희생자 91명을 기리는 기념비를, 많은 희생자가 화형당한 바로 그 지역에 건립했다.

바르도 중심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스테일네세트 기념관Steilneset Memorial은 건축가 페테르 줌토르Peter Zumthor가 설계한 두 개 건물과 예술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가 제작한 불꽃 조형물로 구성된다.

길이 약 135미터에 달하는 건물 중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복도를 특징으로 한다.

내부에는 91개 창문이 있으며, 각 창문에는 전구가 달렸고, 빌룸센이 노르웨이어와 영어로 희생자들 이름과 재판 및 자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적은 글귀가 부착되어 있다.

이 기념관 건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안드레아센에게 이 건축물은 17세기 핀마르크를 공포에 떨게 한 기억을 기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당시 큰 파장을 일으킨 주제들, 즉 사미족처럼 ‘타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여성에 대한 표적화 및 비방이 여전히 만연해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 기념비가 “여성에 대한 이러한 억압이 단지 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아티클이다. 
 
저 시대 마녀가 어떤 존재로 인식되었는지를 유감없이 증언하는 문학작품이 있다. 셰익스피어 맥베스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이 맥베스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나아가 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자 또한 마녀재판 분위기가 물씬하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