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마왕퇴22 [마왕퇴와 그 이웃-22] 팽륭상彭隆祥 (2) 김 단장님과 지난번 통화를 하다가팽융상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팽융상 정보를 주면 찾아보겠노라고 했다. 오늘 올라온 팽융상 정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실 필자도 나름 팽융상 선생 프로필을 찾기 위해 노력했었는데 정보는 물론 이 양반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는 터였다. 역시 언론인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팽융상 선생이 최근 모습을 드러낸 학회가 호남박물원에서 개최된 마왕퇴 발굴 기념 50주년 학회였던 모양인데 이 학회는 필자도 참석 계획을 세웠었는데 일이 바빠 가지를 못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마 등단했던 모양으로 선생의 모습을 보니 90에 가까와 보인다. 다시 시간을 70년대 마왕퇴의 시대로 돌아가보면, 팽융상 선생은 마왕퇴 보존 및 연구를 위해 중국 의학자들의 회의가 진행되.. 2025. 3. 2. [마왕퇴와 그 이웃-20] 방부처리 중인 미라에 몰려든 수십만 군중 마왕퇴 시신은 발견 후 이를 보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었다.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인방 등 당시 문혁을 주도한 이들은 마왕퇴 발굴과 연구 자체에 회의적이라특히 미라 상태로 발견된 시신에 대해서는 아무 가치도 없으니 태워 버리고 끝내라는 주장을 계속했다.하지만, 이런 의견을 누르고 주은래 등은 미라를 보존하고 연구하기로 결정했는데문제는 보존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제겠다. 결국 방부처리는 해부용 시신이나 좀 얻어볼까 하고 찾은 호남의학원 해부학교수들을 잡아 놓고이들에게 협박 반 사정 반으로 제발 도와달라 해서 이루어졌다. 사실 해부학교수들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의학교육용 시신에 대한 방부처리를 하는 방식대로만 처리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2025. 3. 2. [마왕퇴와 그 이웃-16] 마왕퇴를 증오한 강청 사인방은 마왕퇴와 상극에 있다. 처음 마왕퇴에서 어마어마한 전한 시대 무덤이 발견되었단 보고가 올라간 당시, 이 보고를 받고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태워버리라고 일갈한 것은강청을 위시한 사인방이었다. 전한 시대 무덤이라고 해도 결국 반동적 지주계급 유산일 뿐이니문화혁명의 와중에 있는 중국으로선 그딴 것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긴 공자묘도 작살내는 판에 마왕퇴를 왜 보존하겠는가. 이렇게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뒤집어 버린 건 당시 총리 주은래였다. 주은래와 곽말약은 마왕퇴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 이 발굴이 공격받지 않도록 계속 보호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들 역시 사인방에 의해 호시탐탐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마왕퇴를 보호하는 일은 아무리 주은래와 곽말약이라고 해도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 2025. 3. 1. [마왕퇴 스핀오프] 중국 남방 문화와 초 문화 앞에서도 계속 말했고, 뒤에서도 계속 강조하게 되겠지만, 저들 집안이 터잡은 장사長沙는 지금도 그렇지만 강고한 남방 초 문화 전통에 뿌리 박고 있으며, 이런 유구한 전통은 그들이 진秦 혹은 한漢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사한 통일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에서 초 문화 전통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거니와, 이 남방 초문화는 간단히 정리하면 건조한 고원지대 잡곡 중심 황화 문명에 견주어 걸핏하면 범람하는 장강을 기반으로 삼는 저지대 평야 문화이며, 그런 까닭에 물[水]이 차지하는 위치가 막중막비하고, 종교 사상이라는 관점에서는 황화 문명 합리주의에 견주어 무巫 문화 전통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지적해 둔다. 일본의 중국 도교 중심 종교사상사가 후쿠나가 미쓰지福永光司는 내 기억에 .. 2025. 2. 24. [마왕퇴와 그 이웃-11] 문화대혁명 광풍 속 고고학자들 다음의 조연은 당연히 현장의 고고학자들이다. 마왕퇴가 발굴되던 당시의 중국상황은 험악했다. 1966년 시작한 문화혁명은 아직 불길이 다 잦아든 상태가 아니었다. 마왕퇴 발굴이 1971년에 시작하여 1974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중국 대륙에서는 문혁에 의한 공자 비판이 1973년에 시작되어 곽말약이 공자를 숭배한다고 비판받아 스스로 반성문을 써야 할 정도로 정세는 불안정했다. 이 당시 홍위병이 곡부의 공자묘를 습격해 크게 훼손한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정세에서 사실 마왕퇴 발굴과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은 일이나 다름 없었다. 중국에서 나온 마왕퇴 발굴 관련 저서를 보면이 당시 고고학자들의 생고생을 낱낱이 적어 놓은 것이 많은데 물론 사람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게 완벽하지는 못한 것이.. 2025. 2. 24. [마왕퇴와 그 이웃-10] 의학자와 文士의 기로에서 앞에서 쓴 곽말약 이야기를 조금 더 써보겠다. 곽말약은 앞에 쓴 것처럼 큐슈제대 의학부 출신 의학사-의사인데 졸업한 해가 1923년. 당시로서는 최고수준 학벌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래도 환자를 직접 봤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니 졸업과 함께 의사는 사표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겠다. 곽말약 글을 보면 의학자 특유의 섬세함과 날카로움이 보이는데, 추리소설 작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셜록 홈즈 소설에서 의사 특유의 문진법을 추리에 그대로 적용한 코난 도일처럼 의대에서 보낸 본과 4년은 그의 평생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곽말약과 마왕퇴 미라 관련해서는 두 개 이야기가 전한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라 맞는지 틀리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중국 쪽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이 이야기는 언제나 인용되는 부분.. 2025. 2. 23. 이전 1 2 3 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