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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근초고~근구수왕 무렵 백제 강역 서울지방국세청 조세박물관 비름빡에 의함..내 견해가 아님 2022. 12. 26.
5세기 장수왕 무렵 고구려 강역 서울지방국세청 조세박물관 비름빡에 의함..내 견해가 아님 2022. 12. 26.
진흥왕시대 신라 강역 서울지방국세청 조세박물관 비름빡에 의함..내 견해가 아님 2022. 12. 26.
발해 행정구역 서울지방국세청 조세박물관 비름빡에 의함..내 견해가 아님 2022. 12. 26.
발해 지방 특산품 2022. 12. 26.
고려왕조 행정구역 편제 3경 4도호부 12목 2022. 12. 26.
조선시대 조운창 서울지방국세청 조세박물관 비름빡 이걸 보면 평양 이북 지역은 면세지역이었음을 안다. 자체 조달해서 먹고 살아라 이거였던가? 그렇다 해서 저짝에서 공진품이 없었느냐 하면 그게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2022. 12. 26.
이자춘-이성계는 여진을 움직였다 14세기 말. 원나라가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고려도 이에 대한 반격을 시작한 바.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계획을 세우면서 현지 유력자인 이자춘과 비밀리에 접촉한다. 그 당시의 정황이 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기 황후(奇皇后)의 종족(宗族)이 황후의 세력을 믿고 몹시 난폭했으며, 황후의 형 대사도(大司徒) 기철(奇轍)은 쌍성(雙城)의 관리 조소생(趙小生)·탁도경(卓都卿)과 몰래 통하여 서로 당(黨)을 지어 반역을 꾀하였다. 왕이 환조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우선 돌아가서 우리 백성들을 진무(鎭撫)하라. 혹시 변고가 있으면 마땅히 내 명령대로 하라." 하였다. 이해 5월에 기씨(奇氏)를 평정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명하여 가서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2022. 12. 26.
발해의 용원龍原이라는 이름 (2) 앞서 쓴 글에서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部야 말로 대조영 일가의 세거지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제 "동경용원부" 영역을 보자. 한규철 선생 책에 올라있는 그림인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것을 퍼왔다. 용원부 서남쪽에는 남경이 있다. 대략 남경남해부는 북청 함흥 일대로 고려의 북쪽 경계를 이루던 지역에 해당한다. 남경남해부와 동경용원부 경계는 어디쯤이었을까? 당연히 이전에도 이 두 지역의 지리적 경계였던 마운령 어디쯤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발해가 망한 후 고려는 남경남해부 일부를 점거하고 천리장성을 쌓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윤관의 북벌은 동경용원부와의 경계까지 진출하여 남경남해부 전체를 석권한 전역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그 진출 경계선이 진흥왕 순수비가 서 있는 지점이었다고 하겠다.. 2022. 12. 26.
발해의 용원龍原이라는 이름 (1) 앞서 발해의 행정 구역 이름을 보면 발해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발해 15부 하루종일 직장에서 바빴다. 이제 한숨 돌리고 장성 이야기를 계속 쓴다. 잠깐 이야기를 돌려 발해를 보자. 우리는 발해사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발해는 시종일관 중국과 신라와 대립했고 군사 historylibrary.net 발해의 오경 중 동경용원부라는 곳이 있다. 5경 중 한 곳이 위치한 데다. 보통은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 집안을 상경용천부가 있는 지역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에는 대조영 집안 세거지는 상경용천부가 아니라, 이곳 동경용원부 지역이다. 어떻게 아느냐? 동경의 이름을 보면 짐작할수 있다. 龍原이라는 이름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게 아니다. 필자의 짐작이 맞다면, 대조영 집안은 두만강 하.. 2022. 12. 26.
"윤관은 왜 실패했는가"에서 출발한 세종 이도의 음모 정부가 편찬한 조선 왕대별 공식 편년체 역사인 조선왕조실록 중 유독 세종실록에는 지리지가 붙어있다. 세종은 왜 이 지리지를 편찬했을까? 아니, 세종시대를 정리하며 조선왕조는 왜 이 지리를 굳이 넣었을까? 단순히 조선왕조가 개창하고서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그것을 정비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그래서 지리지 말고도 다른 志들을 편찬했다고? 나는 한국 역사상 가장 영토 야욕이 컸으며, 이를 위해서는 음모를 마다 않은 세종한테서 그 음모술수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떤 음모인가? 목적을 위해서는 그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명분을 동반하는 각본에 기반했다. 간단히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 논리를 만들었다. 지리지는 중국이 치고 들어올 때를 대비해 짠 시나리오다. 북방으로 진군해 4군6.. 2022. 12. 26.
함길도가 폭로하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음모 세종은 함경도를 병합하고 나면 명나라로부터 간섭이 있지 않을까 항상 두려워했던 것 같다. 윤관의 비가 두만강 건너 선춘령이라는 구절도 그렇지만, 이 땅이 역사적으로 한반도 국가의 땅이라는 점을 어떻게든 증명하려 했다. 이런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세종실록 지리지의 함경도에 대한 설명이다. [A] 함길도는 본래 고구려의 고지(故地)이다. 고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하고, 동계(東界)로써 삭방도(朔方道)를 삼았는데, 함주(咸州) 이북이 동여진(東女眞)에게 함몰되어 예종(睿宗) 2년 정해 【송나라 휘종(徽宗) 대관(大觀) 원년(元年).】 에 중서 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 2022. 12. 26.
조선전기 변방 생활의 일상 고사리진에서 자다〔宿高沙里鎭〕 성현成俔(1439~1504), 《허백당집虛白堂集》 제13권 시詩 산에 기댄 성첩이 강 언덕에 자리하고 / 石堡憑山枕水崖 성안엔 수십 가구 백성들이 사는 이곳 / 城中數十吏民家 오랑캐 막느라 밤마다 야경 돌고 / 防胡夜夜鳴刁柝 조 심으려 사람마다 자갈밭 개간하네 / 種粟人人墾石沙 숲속엔 조롱조롱 신 자두 열렸는데 / 苦李林間多結子 바위 아래 고사리는 이미 세어 버렸네 / 芳薇巖底已剛芽 변방 지역 경물이란 어찌 이리 암담한지 / 邊庭景物何愁慘 나그네 시 지으며 자꾸만 탄식하네 / 過客詩成屢發嗟 [주-D001] 고사리진高沙里鎭 :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는 고산리高山里로 되어 있다. 평안도 강계에 속한 거진巨鎭으로, 병마첨절제사를 두었다. [주-D002] 間 : 대본.. 2022. 12. 25.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1439~1504)이 증언하는 광개토왕비 황성교를 바라보다〔望皇城郊〕 성현成俔(1439~1504), 《허백당집虛白堂集》 제13권 시詩권 긴 강가에 너른 평야 아득하게 펼쳐지고 / 平郊渺渺長江湄 산이 돌고 물 굽이져 경치가 뛰어난데 / 山回水複多淸奇 어느 시대 영웅이 여기 와서 할거하여 / 何代英雄來割據 지금까지 황성의 기내畿內라고 불리는가 / 至今猶謂皇城畿 흑룡강 왕기 마치 철과 같이 견고하니 / 黑龍王氣堅如鐵 속저의 큰 사업이 마침내 쇠퇴했고 / 屬猪大業冬業衰 하찮은 강좌로는 대적할 수가 없고 / 區區江左抗不敵 중원이 복속되어 오랑캐 땅 되었구나 / 中原左衽皆胡夷 왕업 근거지에 도읍을 정한지라 / 興王之地大都邑 높은 성첩 큰 궁궐이 험한 산에 기댔으니 / 崇墉傑殿憑險巇 백만 공경과 장수 집안에서 / 公侯將種百萬家 부귀영화 누리면서 좋은 시절 .. 2022. 12. 25.
기생의 본고장, 그 좋다는 평안감사 허백당 성현成俔이 증언하는 신년하례회 설날 기록하다 2수. 정미년(1487, 성종18)에 공이 여전히 관서에 있으면서 지었다. 〔元日記事 二首 丁未年公猶在關西作〕 성현成俔(1439~1504), 《허백당집虛白堂集》 제12권 시詩 십여 년 짐 싸들고 변경으로 나돌다가 / 十年書劍走關河 올해는 또 평양에서 새해를 맞았어라 / 又見箕城換物華 장경사의 버들에는 눈이 아직 남았는데 / 殘雪尙餘長慶柳 새봄이 온 대동강에 물결이 또 이는누나 / 新春又發大同波 이른 아침 고을 원들 모두 와서 하례하고 / 早朝鵷鷺盈庭賀 저녁 무렵 친구들이 술병 들고 찾아오네 / 薄暮親朋載酒過 한 도 맡아 다스리니 비록 중한 임무지만 / 分閫保釐雖重任 오운과는 멀고도 먼 해서의 물가로세 / 五雲遙阻海西涯 객관에 귀인들이 비단 방석 깔고 앉고 / 華館犀龜鎭錦茵 기녀들이 세 줄로.. 2022. 12. 25.
한국 고대사의 기록이 빈약하게 된 것은 통일신라에 제대로 된 역사서 한권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으로 본다. 이때 뭐라도 나왔으면 이름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쯤 뭐라고 그 편린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삼국사기를 쓸때 김부식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제대로 편찬된 관찬서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는 게 필자 생각이다. 통일신라시대와 같은 시기, 일본에는 소위 6국사가 편찬되었는데 이 시기 편찬된 사서 권수는 무려 190권에 달한다. 삼국시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통일신라 기록은 뭐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이 시기 기록은 내가 보기엔 관찬사서가 있었는데 태워먹은 게 아니라 편찬을 아예 안 한 것이다. 한국 고대사 문헌의 빈약함을 김부식에게 뒤집어 씌우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든 한글자라도 더 남겨보려고 애쓴 그의 입장에.. 2022. 12. 25.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1439~1504)이 증언하는 평안도 얼음 낚시 동어〔凍魚〕 성현成俔(1439~1504), 《허백당집虛白堂集》 제12권 시詩 북풍 불어와 맑은 강 얼어붙자 / 北風吹作淸江氷 사내들 몰려나와 얼음 쿵쿵 치네 / 萬夫鼓杵聲登登 얼음판에 구멍 뚫고 그물 쳐놓으니 / 氷開小竇施罛罾 다투듯이 뛰어올라 금빛 비늘 파닥파닥 / 金鱗躍出爭飛騰 요리사 칼을 들고 기름진 배 가르자 / 膳夫鑾刀割腹腴 눈처럼 하얀 회가 접시에 가득하네 / 紛紛白雪滿盤盂 취한 눈 어른거려 우물에 빠졌다가 / 眼花飜井醉不省 한 조각 입에 넣자 정신이 깨는구나 / 一片入口精神蘇 병혈의 가어라도 자리를 피하리니 / 丙穴嘉魚應避席 고이 담아 임금님 수라상에 바치리라 / 穿顋貯簏供天廚 [주-D001] 凍 : 대본에는 ‘東’으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02] 취한 …….. 2022. 12. 25.
구스노키 마사시게 楠木正成 (1294~1336)와 칠생보국七生報國 앞에 구스노키 마사시게 남목정성 楠木正成 (1294~1336)에 대한 게시물이 있어 간단히 써 본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앞에 설명 된 대로 메이지유신 이래 천황에 대한 불멸의 충성심의 상징으로 제국 신민이 된 일본인들사이에서 거국적으로 숭배되었다. 지금도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인기는 최고다. 그에 반해 이 사람과 맞서서 이기고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재평가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가끔 나오지만 일반적인 평가는 "대역적"이다.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군을 분쇄하고 무로마치 막부를 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카우지에게도 억울한 점은 있다. 무사들이 천황군을 박살내고 보내버린것은 자기가 처음도 아니고 그 전에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메이지유신의 시대에 볼수 있는 것과 같은 천황에.. 2022.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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