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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는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독후감 소위 다산경학이라고 하면 다산 저작 중 사서삼경 주석을 말하는데 다산 전체 저작 중 그 분량이 꽤 된다.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는 한글번역판이 여럿 나왔고 번역원에서는 온라인에 국한문 대조가능한 버전으로 올려놓았다. 처음 논어고금주를 읽을 때 기대가 컸다. 다산경학을 이야기 할 때 항상 나오는 평은 지금도 인터넷을 찾아보면 많이 있다. 그 중 몇개를 구체적으로 여기 인용해 놓았다가는 그 평을 쓴 분 개인에게 누가 될 수도 있어 따로 인용은 하지 않겠다. 아무튼. 《논어고금주》를 읽기 전에 이 책에 대한 평이 하도 좋아 나는 그래도 오규 소라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유분방한 논어 주석을 기대했다. 《논어고금주》를 일독한 후 나는 비로소 알았다. 내가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논어고금주에 보이는 다산은 주자의 말.. 2023. 1. 16.
다산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필자는 다산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산 폄하가 아니다. 아래에 간단히 생각을 요약해서 써둔다. 문: 그렇다면 다사는 대학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답: 대학자가 맞다. 그것도 퇴계, 율곡 다음으로 들라면 그 저술의 방대함이나 완성도로 볼때 당연히 대학자로 추앙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문: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답: 다산이 대학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에 국한할 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산은 당시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겠지만 그가 소속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이미 18세기말-19세기초에는 동아시아에서도 "이류"가 되어 있었다. 비단 경제적인 측면 뿐 아니라 우리가 그래도 유교경전이라면 좀 상황이 다르지 않았나 싶게 여기는 소위 동양학 인문학의 분야에서도 .. 2023. 1. 15.
다산의 흠흠신서: 그 과대 평가가 유지되는 이유 다산의 흠흠신서는 앞에서도 썼지만 엄청나게 과대평가 되어 있는 책이다. 우리 사회의 이런 과대평가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한 번 써 보겠다. 1. 우선 어떤 분들은 다산의 흠흠신서를 읽어 본 사람들은 무원록을 본 적이 없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산이 흠흠신서에 써 놓은 이야기 이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없는 줄 안다. 실제로 범죄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꼼꼼한 교범이 문서양식까지 첨부되어 이미 통용되고 있었다. 이런 책들이 있는 줄을 모르고 흠흠신서를 보니 그것이 대단한 줄 아는데 오히려 다산의 흠흠신서는 실무에 쓰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대개 다산의 흠흠신서만 죽도록 판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흠흠신서는 잘 아는데 다른 책이 있는 .. 2023. 1. 15.
번역과 논문의 간극? 문제는 형편없는 논문의 대량생산유통이다 By 박헌순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을 옹호해주고 격려해주는 여러 선배 학자가 항상 드는 논리는 이런 것이다. "번역하는기 논문 쓰는 거보다 어렵습니다. 논문은 지가 모르는 부분은 빼놓고 넘어갈 수가 있는데 번역은 한 글자도 빼놓을 수가 없잖아요. 우리 학계가 번역의 가치를 인정 안 하려는건 큰 문젭니다." 라고 한다. 번역 분야에서 생계를 이어온 나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진짜로 번역이 더 어려운 일일까? 하는 의문이 늘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 번역이든 논문이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는것은 초고난이도의 일이다. 대충 아무렇게나 한다면 번역이든 논문이든 쉽다. 현재 우리나라에, 출판이 되었든 웹서비스에 있든, 번역자료와 논문자료를 상호 비교했을 때에, 읽.. 2023. 1. 15.
영인첨부 신서원 刊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 고전 역주를 실은 나는 선호한다. 원전을 영인 첨부했으니 씰데없는 탈초 의심을 덜 수 있다. 한국 교감학은 아직도 원전을 함부로 손대는 경향이 다대한데 교각살우인 곳이 지천이라 바로잡는답시며 엉뚱하게 고친 곳 천지다. 한데 이 《고려사절요》는 아주 원전을 도장박듯이 해서 그런 시비에서 해방했다. 이걸 출판사에선 좋아하지 않는다.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돌아간 신서원 사장의 고집이라 들었다. 선한 그 분 웃음이 그립다. 신서원 역주본 중에는 이런 스타일이 제법이다. (2016. 1. 15) 2023. 1. 15.
신작로가 낸 능산리고분, 폐결핵이 준 선물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능산리 고분군 출현은 부여-논산 구간 신작로 개발의 부산물이다. 한데 재미있는 점은 능산리 고분군이 한동안 알려지지 않은 사연이다. 이곳에 선산을 조성한 지방 유지의 압력 때문에 비밀이 새어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어떻든 이런 비밀을 군청에서 접한 세키노 일행은 능산리 고분군 현장으로 간다. 이때가 1916년 7월이라 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계절이었다. 이 조사에 동행한 이를 세키노는 “야쓰이 문학사와 고토後藤 공학사”라고 한다. 야쓰이는 1909년 조사에서도 동행한 인물이다. 한데 이번에는 고토라는 사람이 새로이 동참했다. 고토는 누구일까? 그는 고토 게이지(後藤慶二·1883~1919)다.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는 일본 건축사에서는 도쿄의 도요타마감옥豊多摩監獄 .. 2023. 1. 15.
Non-교수 대학박물관장 탄생에 부친다 성균관대박물관장에 김대식 씨…학예직 출신 첫 대학박물관장 김예나 / 2023-01-15 07:33:00 약 25년간 일한 박물관 베테랑…박물관장-교수 겸직 현실 속 변화 주목 https://k-odyssey.com/news/newsview.php?ncode=179534318270026 김대식은 천상 박물관에 미친 사람이다. 모교 사학과 출신으로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는 1998년 또 같은 대학 부설 박물관에 임용되어 죽 일했으니, 이런 그라고 왜 교수 욕심이 없었겠는가만은, 또, 그 과정에서 왜 환멸이 없었겠느냐만, 오척단신 이 사람이 단 한 번도 박물관 업무를 단념 푸념하거나 주어진 일자리로 만족하는 일을 나는 본 적 없다. 그는 귀잖을 정도로 집요하고 열성이었으니, 내가 저 .. 2023. 1. 15.
다산의 시대, 이미 조선은 학문수준에서 동아시아 꼴찌였다 다산이 활동하던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 이미 조선은 학문수준에서 동아시아 꼴찌였다. 조선선비들이 죽도록 한 거라면 책읽는 거라 다산이 활동하던 시기에 그래도 유교경전 하나는 수준있게 이해하지 않았냐 싶겠지만, 천만에. 다산의 시대. 조선은 학문수준에서 이미 동아시아 꼴찌였다. 다산 자체가 부정되어야 18-19세기의 한국의 상황이 보인다. 학문수준에서 이미 다른 나라에 내세울 수준이 안 되는 인물을 굉장한 대학자로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으려 드니 18-19세기 조선의 상황이 제대로 안 보이는 것이다. 2023. 1. 15.
다산이 당대 조선 최고의 지식인은 맞다 하지만.. 그가 가진 사상이 근대화와는 별 상관도 없고, 유학자로서 박학다식하여 이것 저것 모아 엮은 박학다식-백과전서파의 지식인었지만, 그조차도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의 당대 지식의 수준보다 떨어지는 것이었다면, 다산의 가치는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다산신화"도 이제 "세계화"의 냉정한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다산은 지금 한국사에서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나 다름없다. 누구도 잘 모르면서 대단하다고 이야기 한다. 어디가 대단하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한다. 그러면 대단한 게 맞기는 맞는지 한 번은 의문을 가져야 옳지 않겠는가? 2023. 1. 14.
읽어보지도 않고 칭찬하는 다산 다산에 대한 평론서 태반은 재대로 읽어보지도 않았거나 읽어 봐도 다산이 쓴 책만 보고 쓴 내용이 태반이다. 쉽게 말해서 다산이 한 주장이 유학사 전체 줄기에서 얼마나 다른 것인지, 구체적으로 다산이 뭐라고 했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쓴 글이 태반이라는 소리다. 다산에 대한 평가는 바닥부터 다시 해야 한다. 2023. 1. 14.
시체까지 남기곤 홀연히 떠난 합덕제 고니 얼마전 고니 사진 몇 장을 외부 제공사진으로 우리 공장에서 발행했는데 살피니 촬영장소가 당진 합덕제라 이곳 터줏대감 고대영한테다가 진짜로 합덕제에 고니 잔뜩 있냐 기별하니 그렇다 해서 그래 이번엔 합덕제 고니 때려잡으러 가자 해서 주말 맞아 길을 나서는데 근자 계속 봄날 같은 포근한 날이 여전한데다 전날부터 내린 비가 계속 가랑비로 여진이었으니 아산 주민이자 우리 아카데미 수강생인 노씨한테 차 대령하라 하고선 천안아산역에서 접선해 당진으로 가는데 짙은 안개에 포근한 날씨가 영 께름칙하기만 했다. 가는 길에 혹시나 해서 고씨한테 다시 묻기를 고니 있는 거 맞나 했더니 자신 있게 네 하면서 덧붙이기를 며칠 전에도 고니 시신 한 구를 수습해 안장했노라 해서 조류독감이냐 물으니 그건 아니랜다. 마침내 도착한 합.. 2023. 1. 14.
학문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필자가 연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나라의 본격적 연구작업은 이제 태동기를 벗어나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하려 하고 있었을 무렵이다. 그 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우리 학문 풍토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연구비가 많은 쪽으로 몰려다니고, 소위 최신 기법에 열광하다 보니 모든 사람이 똑같은 연구를 한다. 이런 현상은 학계에만 그런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음식점과 같은 상가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오래된 상점이 없는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은 탓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거의 비슷한 일을 하고 몰려다니는 기풍의 탓도 있다. 위 사진은 아래 기사에 나온 표본이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01/14/WGIPJR4PCZFRDGUPWM5J5YUOFY/ .. 2023. 1. 14.
글쓰기 환경의 변화, 오래 사는 놈이 이기기 마련 작년 모처에서 원고 집필 의뢰가 왔다. 나한테 할당한 주제는 언론에 비친 한성백제 유적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문화재 분야 기뤠기로 활동한 데다 풍납토성 발굴기를 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를 탈초하면서 각 언론사가 구축한 피디에프 원문서비스에 거의 절대로 기대었다. 신문만이 아니라 다른 자료도 검색이 용이하다. 2000년 졸저 풍납토성을 낼 때만 해도 나는 일일이 신문잡지를 찾아다니며 뒤져야 했다. 그에서 놓친 자료가 얼마나 많겠는가? 작년 원고를 쓰면서 그에 고맙고 그에 분개하기도 했다. 식민지시대 조선을 주무대로 활동한 일본의 역사고고학도들은 그 무렵 내가 열전 혹은 약전이라도 쓰겠다며 정신없이 자료를 긁어모은 적이 있다. 금서룡 관야정 흑판승미야 워낙 유명하니 그런대로 족적을 정리했지만 기타 오전성오니.. 2023. 1. 14.
흑판승미黑板勝美, 고문서학과 고고학의 만남 이 친구가 흑판승미黑板勝美..쿠로이타 카츠미(현행 외래어표기법상으로는 구로이타 가쓰미)다. 1874년에 태어나 1946년에 향년 73세로 졸했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나 늦은 나이에, 아마 서른살인가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업적은 초인 그 자체다. 박사학위 논문이 고문서 양식론이다. 그는 일본 고문서학의 아버지다. 사료 정리에 혼신을 쏟았다. 제도로서의 역사학과 제도로서의 문화재정책을 수립한 일등 공신이다. 미친 듯이 일했고 미친듯이 써제꼈다. 열성적이었다. 자비로 유럽 문화재 현장을 시찰했다. 이집트를 보고는 고고학 겸업을 선언했다. 혼자 배운 고고학을 실현할 현장을 찾다가 마침내 조선에 상륙해 지산동 무덤을 파고 능산리 고분을 팠다. 그의 발굴보고서는 그래서 동시대 세키노 사단의 그것과는 달리 무척이.. 2023. 1. 14.
석굴암의 '원형', 그리고 사진엽서 호들갑 석굴암의 '원형' 2007.9.18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석굴암은 늘 '원형' 시비에 휘말린다. 성균관대박물관이 마련한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석굴암ㆍ불국사ㆍ남산' 특별전에 191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석굴암 관련 유리원판 사진이 여러 점 공개됨으로써 원형 논란이 재연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논란의 출발은 새로운 자료가 석굴암 원형을 말해준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석굴암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가 발견되었으니, 이에 근거할 때 종래의 석굴암 원형 논쟁, 혹은 지금의 복원된 석굴암 구조는 어떤 점에서 잘못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식의 주장이 이번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자료가 발견된 것과 그것에 담긴 석굴암 구조가 .. 2023. 1. 13.
퇴계 전문박물관으로서의 도산서원, 문화재 보수 잘못해서 신세 조진 서원 원장 도산서원을 배알한 기문〔謁陶山書院記〕 이익李瀷(1681~1763), 《성호전집星湖全集》 제53권 기記 내가 청량산淸凉山에서 발길을 돌려 도산을 방문할 때 신택경申澤卿이 함께하였다. 반나절쯤 길을 가서 온계溫溪를 지날 적에 길가에서 멀리 서원을 가리키며 물으니, 답하기를, “노老 선생의 선대부先大夫 찬성공贊成公과 종부從父 승지공承旨公, 형 관찰공觀察公 세 분을 제사하는 곳입니다.” 하였다. 영남 사람들은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여 선생의 어버이와 스승에 대해서도 모두 추중推重하고 향모向慕함이 이와 같다. 하물며 선생의 유적遺迹이 있고 가르침을 베푼 곳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공경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다시 작은 고개를 지나 먼저 애일당愛日堂을 들렀으니, 바로 이 농암李聾巖이 살던 곳으로 매우 아늑하고 절묘한.. 2023. 1. 13.
복기대를 다시 봐야 한다 2002.12.25 08:02:15 요서지역 청동기문화 조명 단행본 선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기원전 2400년 무렵 지금의 중국 요서 지역에서는 홍산문화(紅山文化)라고 일컬어지던 신석기시대 후기 문화가 붕괴하면서 또 다른 문명이 탄생했다. 비슷한 시기 황하 중상류 지역에서는 소위 중원(中原)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원문화는 하(夏).은(殷).주(周) 및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秦).한(漢)시대에 이르러 지금의 중국 영토에 거의 맞먹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된다. 현재의 중국이 뿌리를 진.한 제국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 중원문화가 그 주변 문화를 '정복'하고 궁극적 승리자로 떠올랐기 때문에 이런 관점은 역사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쳐 중원 문화를 제외한 주변 문화는 그 하위 범주로.. 2023. 1. 12.
대한제국 관리의 43.7 퍼센트 대한제국이 망한 후 이 나라에 봉사하던 공무원들은 전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놀랍게도 대한제국 공무원은 43.7퍼센트는 망국 이후에도 관리로 계속 봉사했다. 물론 이들을 친일이라고 질타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이들이야 말로 참으로 불행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아마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초를 이룬 각계 거물로 성장했을 것이다. 43.7퍼센트 대한제국 관리는 망국 후 왜 그 자리를 벗어던지지 못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라 본다. 43.7퍼센트 대한제국 출신 관리들 중 60.7퍼센트는 하급관리인 판임관으로 전락했고 고급관리는 일본인으로 채워졌다. 이들에게 있어 대한제국이 망한 후에도 관리를 계속한다는 것은 그다..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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