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21625 없어졌어야 하는 훈민정음, 그것이 살아남은 기적의 이야기 기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어 표기 수단이 공식 발명되기는 1443년, 세종 25년이며, 그것이 공식 반시되기는 3년 뒤인 1446년, 세종 28년이다. 이 시점이 왜 중요한가?온갖 반대를 무릅쓰고서 저 사업을 밀어부친 세종 이도는 반시 기준으로 불과 4년 뒤인 1450년에 훅 가버리기 때문이다. 권력층 어느 누구도 흔쾌히 찬성했다고는 볼 수 없는(실제 이를 열렬히 찬성한 사람은 쉬 눈에 띠지 않는다.) 이런 사업은 그것을 밀어부친 최고 권력자가 훅 가버리면 이내 없던 일로 흐지부지하고 만다. 이 점에서 저 훈민정음은 놀랍기 짝이 없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저 결정적인 핸디캡, 곧 그 절대의 사업추진자가 훅 가버렸음에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더 요상한 점은 반시와 더불어 국가적 사업으로 세종.. 2025. 9. 15. 헬레니즘 시대 해시계 터키서 발견, 그리스 해양 유산 흔적 담아 터키 서부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 도시 아이가이Aigai를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이 놀랍도록 보존 상태가 좋은 2,200년 된 해시계sundial 하나를 발굴했다.이 해시계는 헬레니즘 시대 시간 측정과 해양 문화에 대한 전례 없는 통찰력을 제공한다.도시 의회 건물인 불레우테리온Bouleuterion에서 발견된 이 특별한 유물은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된 것과 더불어, 현재까지 알려진 단 두 개 해시계 중 하나다.이 희귀한 발견은 헬레니즘 시대 고대 그리스 문명을 특징짓는 정교한 과학적 지식과 예술적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 그리스 리포터Greek Reporter 보도에 따르면 마니사Manisa 주 유누셈레Yunusemre 지구에 위치한 아이가이는 기원전 8세기에 에올리아Aeolian 그리스인들이 건설해 거의 .. 2025. 9. 15. 가장 오래된 도마뱀 조상 영국서 발견 과학자들이 수요일, 영국 남서부에서 도마뱀과lizard family 중 가장 오래된 종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이 작은 동물은 2억 4천 200만 년 전 놀라울 정도로 큰 이빨을 이용해 바퀴벌레를 사냥했다. 공룡이 출현하기 직전인 중기 트라이아스기Middle Triassic epoch를 산 이 고대 파충류는 몸 전체가 사람 손바닥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브리스톨 대학교 댄 마크Dan Marke는 성명을 통해 "이 새로운 동물은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동물과도 다르며, 우리 모두에게 도마뱀, 뱀, 그리고 투아타라의 진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투아타라는 뉴질랜드 파충류다. 파충류 일종인 인룡목lepidosauria order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이 동물 골격이 2015년 영국 남.. 2025. 9. 15. 필리핀서 멸종된 코끼리 친척 스테고돈 두개골 발견 헤엄쳐 건너간 듯, 호주 연구진 구명 필리핀에서 현생 코끼리의 멸종된 친척인 스테고돈 두개골 화석이 루손섬 북부 카가얀Cagayan 솔라나Solana 지역 주민한테 발견되었다고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울런공 대학교(UPD-CS)와 UP 딜리만 과학대학(UPD-CS) 고생물학자들이 보고했다. UPD-CS 국립지질과학연구소(NIGS) Meyrick U. Tablizo와 Allan Gil S. Fernando 박사, 그리고 울런공 대학교 Gerrit D. van den Bergh 박사는 최근 백만 년 된 스테고돈Stegodon 두개골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고생물학자들은 이 스테고돈이 아마도 평균적인 필리핀인보다 약간 더 큰 "십 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이 집단에서 완전히 성장한 스테고돈은 현존하는 아.. 2025. 9. 15. 박가분과 두산 (1923년) 1923년에는 박가분이라는 화장품 광고가 나온다. 이 박가분을 제조판매한 이는 박승직이라는 사람인데 두산그룹의 창업주, 바로 그 사람이다. 1920년대 초반만 해도 신문 광고는 태반이 일본을 거쳐 들어온 미국, 유럽 수입품 아니면 일본 공산품이 대부분이라 한국에서 제조된 상품 광고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 면에서 박가분은 우리나라 화장품 광고의 효시라 할 만 한데 불행히도 이 안에는 납이 들어 있어 나중에 큰 물의를 빚었다. 두산 그룹은 이 박가분으로 시작하여 기업을 일구었다. 2025. 9. 14. 불교, 해동 요순海東堯舜 세종의 유일한 흠결 세종 32년 경오(1450) 2월 17일(임진일)에 이도李裪가 숨을 거두니 이가 훗날 성군이라 추앙받는 조선 4대 왕 세종이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데는 궁궐이 아니라 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1434~1467) 집 별서였다. 그의 죽음을 전하는 세종실록 해당 날짜 기사다. 임금이 영응 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훙薨하였다.이 소식을 전하면서 사관은 왜 궁궐이 아닌 영응대군 집이었는지를 알릴 만한 이유가 있다 생각했음인지 다음과 같은 협주狹注를 적었다.처음에 영응 대군 집을 지을 때, 명하여 한 궁을 따로 집 동편에 세워서 옮겨 거처할 곳을 준비하였다.적자로서는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은 봉작 명칭 변화가 많다. 태어나자 영흥대군永興大君이라 했다가 1447년, 세종 29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이라 고쳤다.. 2025. 9. 14. 영국 구빈원은 노예 착취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헐값에 노동력 운용, 설립자 대부분은 열렬한 노예제론자 영국 구빈원들workhouses은 노예 제도에서 얻은 부에 기반하여 설립되고 유지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by 카디프 대학교 카디프 대학교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영국 구빈원은 근대 초기부터 노예 제도 및 제국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Antipode 저널에 게재된 이 논문은 산업 자본주의 성장기에 영국 구빈원을 빈곤과 노동을 관리하는 국내적 메커니즘으로만 이해하는 데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 연구는 오히려 영국 구빈원이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대서양 세계를 특징짓는 노예 제도, 식민주의, 인종 착취라는 세계적 시스템에 깊이 얽혀 있었음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방대한 기록 자료를 활용하여 영국과 식민지 간 사람, 돈, 그리고 .. 2025. 9. 14. 고보와 중학교: 그 해묵은 증오 일제시대에 중학교라고 해서 전부 일본인은 아니고 조선인들도 다니는 경우가 있긴 했는데 대체로 조선인들은 고보, 일본인들은 중학교에 모였다. 따라서 일제시대에 무슨 무슨 중학, 하면 1937년 이전에는 이 학교는 일본인 학교로 생각하면 된다. 조선인들이 모이는 고보는 벌써 20년대가 되면 출세의 통로로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하여 고보 뿐 아니라 보통학교도 입학시험이 격화하는 과정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인의 고보는 앞에서 조선일보 사설에서 보았듯이 똑똑한 사람들만 들어갈수 있는 학교라 일본인들이 모이는 중학교보다 고보의 인적 풀이 더 우수했다는 증언들이 꽤 있고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일본인들 같은 경우에 식민지 조선의 중학교에 진학하는 이들이 뭐 본토에 있는 일본인들에 비해 별로 그렇게 우수했을 것 .. 2025. 9. 14. 350년 된 볼리비아 '잉카' 미라 두상, 알고보니 현지 원주민 볼리비아에서 발견된 미라 두상은 오랫동안 잉카인의 것으로 여겨졌지만,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다른 역사를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100여 년 전 볼리비아에서 발견된 이 특이한 미라 두상이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원래 잉카인의 유해로 간주된 이 미라 두상은 실제로는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의 것으로, 의식 일환으로 두개골에 상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연구진은 이번 분석이 해당 인물을 고고학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그들의 지역 역사를 되살리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다. "이 유해는 단순히 인류학 소장품에 있는 뼈가 아닙니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주립 고고학 및 역사 박물관 박물관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클레어 브리종Claire Brizon은 이렇게 말했다. "이 유해.. 2025. 9. 14. "누군가는 그럽디다, 만리장성이라고" 북악산의 유홍준 유홍준 씨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이니 노무현 정부 때 일화다. (지금 찾아보니 2006년 일이라 나온다.) 당시 청와대 주변을 시민 국민 품으로 돌려준다는 풍조가 만연한 때라, 이 흐름을 본격화한 이는 실은 김영삼이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YS가 대통령 취임 직후 취한 일련하는 개방 움직임은 지금은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 하나하나 뜯어보면 혁명을 방불했으니 청와대 앞길을 개방한 이는 그였다. 그런 흐름이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계속됐으니 그가 취한 저 흐름 연장성에 위치하는 조치가 북악 일대 개방이었다. 그를 뒤이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추가 개방 움직임이 있었으니 암튼 노무현 정부 시절 그 화룡점정은 북악 일대 한양도성 일대 구간 개방이었다. 이 개방을 유홍준은 그 자신이 주도한 업적처럼 선전했으나 실.. 2025. 9. 14. 같은 5년인데 왜 입학률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 일제시대 2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 조선에도 제국대학이 만들어지고 전문학교들이 설립되어 학생을 뽑기 시작했기 때문에 각종 신문에는 입학률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제국대학 예과 합격자 명부가 나오면 이 기사는 신문 기사로 전 합격자 이름이 모두 실릴 정도였다. 경성제일고보 합격만 해도 집안에 경사가 나는데 경성제대 예과면 조선시대 과거 문과 합격 이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몇 년 지나고 보니, 조선인들에게는 의문이 생겼다. 바로 경성제대 예과 입학생 합격률이 조선인과 일본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조선인은 합격률이 전체 응시자 중 10프로 정도 (응시자 600명 중 합격자 66명) 인데 일본인은 350명이 응시했는데 그 중 83명을 뽑은 것이다. 위 동아일보 사설은 그래서.. 2025. 9. 14. 일제시대 대학생 수는 고등학교 수가 결정한다 식민지시대 대학생 수는 고등학생 수와 1대 1로 대응했다. 쉽게 말해 일본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국공립대 어딘가는 갈 수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도 인기과는 있기 때문에 경쟁에 밀려 원하는 곳을 못 가는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고등학생 정원은 대학생수와 크게 다르지 않아 일본의 구제 교육제도에서 고등학생이란 경쟁에서 자유로운 학창시절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다.따라서 고등학교가 몇 개나 있는가를 알면, 할당된 대학생 숫자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일본에는 구제고등학교舊制高等學校가 몇 개가 있었는가. 한 번 알아보자.먼저 구제고등학교 정점에는 제1고등학교에서 제8고등학교까지 8개교가 있다.이를 "넘버 스쿨"이라 불렀다. 고등학교 이름 앞에 번호를 붙여 불렀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는 번호가 아니라.. 2025. 9. 14. 나치가 약탈한 네덜란드 꽃 그림 두 점 오하이오 경매 나왔다가 중단 17세기 꽃 유화 정물화 두 점이 경매에 나왔지만 한 재단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에게 약탈당했다고 주장하면서 경매가 중단되었다. 콜럼버스 디스패치The Columbus Dispatch 보도에 따르면 5인치 x 8인치 크기 이 그림들은 미국 오하이오주 뉴어크Newark에 있는 애플 트리 경매 센터Apple Tree Auction Center에서 안전 금고에 있던 미수령 물품 판매 일환으로 판매될 예정이었다. 모뉴먼트 맨 앤 위민 재단Monuments Men and Women Foundation과 유대인 디지털 문화 회복 프로젝트Jewish Digital Cultural Recovery Project (JDCRP) 조사에 따르면, 이 두 그림은 원래 아돌프Adolphe와 루시 하스 슐로스Lucie Ha.. 2025. 9. 14. 교육: 선의의 정부는 무리를 한다 교육제도는 한 나라가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하다. 교육된 인구가 있어야 근대화고 나발이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화 초입에특히 동아시아처럼 전혀 다른 교육제도 하에서 살아왔던 이들은 근대적 교육제도를 수립하려 해도 돈도 없고 사람도 없다. 이 때문에 교육제도 정비 초기에는 많은 무리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도 메이지 초기, 근대적 교육제도가 수립될 때까지 많은 무리를 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메이지 초기에 입신한 많은 이는엉망인 학벌을 가지고 있다. 사범학교에 정규교육 졸업 경력 없이 입학하고 1년 만에 졸업하고 선생이 된다던가, 육사 입학에 정규교육 졸업 경력 없이 받는다던가, 후일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대학예비교에 몇 년 안 되는 교육 경력으로 입학.. 2025. 9. 14. 일제시대: 대학진학에서 고등학교가 왜 중요했는가? 일제시대라고 해서 대학진학자가 백프로 중학교-고등학교 경로를 거친 것은 아니다. 확률은 많이 낮지만 조선인 중에도 소위 "천재"라는 이들은 이 높은 문턱을 뚫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고보 출신 중에도 경성제대 예과에 합격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조선천지의 천재들이다. 그렇다면 왜 일제시대, 대학진학에 있어서 고등학교에 우선 입학하는 것이 중요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일제시대의 고등학교나 대학예과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지금 의예과를 연상하면 된다. 다들 알다시피 의대 본과 진입 전에는 예과 2년을 거치게 되는데 이 의대 예과 2년이 바로 일제시대의 고등학교, 혹은 대학예과에 해당한다. 이 시대에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입학이 되어 있어야 유리.. 2025. 9. 14. 본토에는 없던 고등보통학교의 변칙성 위 그림에서 왼쪽은 이른바 2차 대전 이전 일본 학제인 구제 교육제도이다. 오른쪽이 종전 이후 새로 도입된 6.3.3.4 제로 우리와 같은 방식이다. 왼쪽 구제 교육제도를 보면, 소학교 다음에 여러 학교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중학교를 나와야 대학이고 전문학교고 진학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고등보통학교 (고보)라는 건 일본의 교육제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런 변칙적 학교를 1937년까지 조선에서 유지했다. 이렇게 일본의 교육제도에서 포괄하기 어려운 학교를 만들어 놓으니 조선에서 고보를 졸업한 이들은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물론 진학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아주 어려워지는 것이다. 일례로 조선의 전문학교는 위 일본 교육제도에서 보면 중학교 졸업후 진학하는 고등상업, 고등농업, 고등공업학교.. 2025. 9. 14. 고보가 고등학교로 둔갑한 이유 일제시대에 살던 조선인들이나 일본인들 모두, 고보는 고등학교가 아니라는 것, 고보는 중학교와 같은 급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있겠는가? 고보를 나오면 상급학교라면 결국 고등학교 아니면 전문학교, 대학예과 등인데 고등학교와 대학예과는 언감생심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아주 예외적으로 여석이 있거나 정말 뛰어난 조선인은 그 벽을 뚫고 들어가는 천재들이 있기는 했지만, 고보 졸업생이 상급학교라고 하면 높은 확률로전문학교,낮은 확률로 고등학교, 대학예과 등이었기 때문에 고보가 고등학교가 아니라는 것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제말 (1937년), 제3차 조선교육령 때고보는 일괄해서 모두 중학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면 고보는 왜 고등학교로 인식되게 되었을까? 고보가 고등.. 2025. 9. 14. 조선에는 없던 구제고등학교 해방 전 조선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없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조선에서 고등보통학교 (고보)가 고등학교라고 오인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고등학교가 조선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일제시대에는 대학진학을 위해서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제대로 된 코스였다. 물론 고등학교 들어가지 않고도 대학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주 어려웠다.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 코스를 밟지 않으면 제대로 된 대학을 쉽게 들어갈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조선에서 고보를 나온 조선인들은 대학 진학이 쉽지 않았다. 이 구제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유일한 조선의 학교가 경성제대 예과다. 대학예과와 구제고등학교는 급이 같고, 중학교와 고보가 급이 같은 중등학교다. 일제시대에 위와 같은 모자가 구제고등학교 모자였다. 이수.. 2025. 9. 14. 바이킹 선 오세베르그, 100년 만에 움직였다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바이킹선이 험난한 마지막 여정을 무사히 마쳤다.전문가들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000년 된 세 척 바이킹선, "오세베르그Oseberg", "곡스타드Gokstad", "튠Tune"을 약 115야드(약 90미터) 떨어진 오슬로의 새 안식처로 옮기기 위한 심혈을 기울여 왔다. 먼저, 바이킹선 뱃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뱀 머리가 정교하게 조각된 소용돌이 모양으로 휘어져 있었다.배는 노란색 안전 조끼를 입은 작업자들에게 분당 10인치(약 30cm) 속도로 움직였다. 오슬로 문화사 박물관 관장 아우트 퇴네센Aud Tønnessen은 노르웨이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 순간, 이 배가 얼마나 아름답고, 위엄 있고, 자랑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마치 아주 천천히 당신을 향해 .. 2025. 9. 14. 3,300년 이집트 호루라기, 왕릉 '경찰관'이 사용한 듯 이집트 고고학자들이 소 발가락을 깎아 만든 3,300년 된 뼈 호루라기를 발굴했는데, 이는 고대 "경찰관"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다. 3,300년 된 소 발가락 뼈로 만든 호루라기가 투탕카멘 아버지가 세운 고대 이집트 수도 아케타텐Akhetaten (현재의 아마르나Amarna)에서 발견되었다.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이 호루라기는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된 최초의 뼈 호루라기이며, 수천 년 전 왕릉 인부들을 감시하던 "경찰관"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호주 그리피스 대학 고고학 부교수이자 공동 연구자인 미셸 랭글리Michelle Langley는 "매우 독특하다"고 말했다.아마르나 프로젝트 고고학자들은 2008년 아케타텐 유적 발굴 과정에서 이 휘슬을 발견했지만, 최근까지 분석하지 않았다.이 도시는 태.. 2025. 9. 14. 고보는 고등학교가 아니다 이 부분은 언젠가 필자가 한 번 썼지만 심지어는 일제시대를 공부한다는 분들 중에도일본 구제 교육제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은 글들이 보여이 기회를 빌어 다시 여기 조금 써 본다. 필자가 알고 있는 지식도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지금 국내에서 통용되는 일제시대 구제교육에 대한 정보보다는 자세하고 정확할 것이다. 일제시대 교육제도에 대한 우리의 오해 중 가장 큰 것은 고보를 고등학교로 보는 것이다. 이건 완전한 착각인데, 일제시대 고보는 5년제로 소학교 6년을 마치고 진학하는 학교였다. 어차피 우리도 고등학교 중학교 합해서 6년이니일제시대 5년제 고보라고 해도 마찬가지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고보는 고등학교가 아니고 일제시대에는 중등과정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학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 2025. 9. 14. 이전 1 ··· 28 29 30 31 32 33 34 ··· 1030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