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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한국사 그 순간 -1-]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 김유신, 춘추 방에 언니 대신 동생 들여보낸 까닭 [중앙선데이] 입력 2016.06.26 00:40 | 485호 23면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이민족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혈통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는 불완전한 민족 통일을 달성했다는 이유로 김춘추와 김유신(595~673)을 싸잡아 비난했다. “김유신은 지용(智勇·지혜와 용기) 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취한(陰險鷲悍)한 정치가며, 그 평생의 대공(大功)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인국(隣國)을 난(亂)한 자”라고 했다. 음험취한은 요컨대 음흉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단재는 그 보기로 그가 김춘추와 처남 매부가 된 사연인 소위 ‘축국(蹴鞠) 사건’을 들었다. 혹독하기 그지없는 이런 평가는 그 이전까지 천 수백 년가량 지속된 만고의.. 2018. 1. 20.
김유인의 70세 치사致仕(정년퇴직)와 생일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에 의하면 그 재위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고 하거니와, 이때 김유신은 70세가 되는 해였다.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에 이르기를 70세가 되면 치정致政한다 했거니와, 이는 정확히 그 예법이 문무왕 당시에 통용함을 보여준다. 치정이란 글자 그대로는 정사政事를 놓는다는 뜻이니 흔히 치사致仕라 한다. 다시 말해 이 시대 신라는 예기가 대표하는 예법이 그대로 법률 혹은 관습으로 강제되고 있음을 본다. 한데 이에서 주목할 점이 있거니와 하필 김유신이 치정을 요청한 때가 그해 시작 시점인 정월인가 하는 대목이다. 고래로 70 치정에 관련해서는 70세가 되는 시점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가.. 2018. 1. 20.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8편 잘라버린 남편 ‘귀두’를 음부에 제사지낸 아내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4월11일 13시55분이다. 1. 서악동의 신라 시대 귀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무덤을 비롯한 중고시대 신라 왕릉 밀집지역인 서악고분군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전면에 봉분 두 기가 붙었으니, 하나는 김춘추 9세손으로 신라 하대 인물인 김양(金陽)이 857년 향년 50세로 졸하고는 묻힌 곳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김춘추의 둘째아들 김인문(金仁問) 묘라고 전한다. 이 두 봉문 앞에는 몸돌과 머릿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것을 받쳤을 거북 모양 받침돌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이를 서악동 귀부(龜趺)라 한다. 보물 제70호인 이 귀부에 대한 현지 안내판은 김인문 묘비를 받치던 것이라 기술한다. 이 지역에 기반을 둔 역사학도 중에는 김양 묘와 함께 선.. 2018. 1. 20.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7편 귀두 내밀고 지상에 강림한 김수로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 04월 06일 12시 30분이다. 1. 동아시아의 카니발 계욕일 애초 계획은 아니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지금껏 이 독사일기는 고려 시대 도굴 이야기로 채웠다. 여전히 그에 대한 이야기가 더러 남았지만, 다른 곳에도 눈길을 돌려보기로 하자. 이번에는 한국 고대문화에 나타나는 섹스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서는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제하 기사를 통해 김수로에 의한 가야 건국 사정을 정리했으니, 이에 의하면 이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시대에 해당하는 대강(大康) 연간(1075~1084)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를 지낸 사람의 문인이 쓴 원본을 간추린 이야기라 한다. 이때 ‘가락국기’란 그 문인이 쓴 책 이름이면서, 그것을 .. 2018. 1. 20.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6편 조선총독부가 빗장을 연 쌍릉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 조사, 목관 발견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3월29일 11시00분이다. 앞서 우리는 충숙왕(忠肅王) 재위 16년(1329) 여름 3월에 발생한 금마군(金馬郡) 호강왕(虎康王) 무덤 도굴이 대규모로 이뤄졌고, 더구나 그에 권력층의 비호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나아가 이 호강왕릉이 실은 백제 무왕의 부부능으로 통하는 지금의 익산 쌍릉임도 보았다. 그렇다면 당시 이들이 도굴한 쌍릉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무덤일까? 이를 위해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에 의한 쌍릉 조사 성과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기록에 의하는 한 충숙왕 때 문을 연 쌍릉이 두 번째로 문을 연 시점이 이때이기 때문이다. 물론 쌍릉은 충숙왕 이전에도 도굴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 그 이후 식.. 2018. 1. 20.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5편 기자조선과 백제, 그 괴이한 조우 “미륵사 석탑은 백성의 고혈 짜낸 죄악”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3월09일 13시55분이다.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이 대부분 찬술한 가운데 그 일부는 그의 제자 무극(無極)이라는 승려가 보충했다는 주장이 이제는 적어도 학계에서는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도 군데군데 있다. 특히 그 맨 앞에 붙은 가야를 포함한 네 나라 왕들과 후삼국 왕들의 계보인 왕력(王曆)이 그 이하 본문과는 어떤 관계인지는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지금 살피고자 하는 백제 무왕(武王) 역시 그러하다. 이곳 왕력 편에서는 백제 제30대 왕인 그를 일러 “무강(武康)이라고도 하는데 헌병(獻丙)이라고도 한다. 혹은 어릴 때 이름을 일로사덕(一耆篩德)이라고도 한다. 경신년(600)에 즉위해 41년을 다스렸다”고 했다... 2018. 1. 20.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4편 고려 충숙왕 시대의 쇼생크 탈출 - 금마군 무강왕릉 도굴범, 감옥을 탈주하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 시간은 016년03월02일 14시00분이다. 이 《독사일기》 맨 처음에 나는 원나라 공주 눌륜의 무덤이 도굴된 일을 다루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충숙왕(忠肅王) 재위 16년(1329) 여름 4월이다. 한데 이보다 한 달 전에는 금마군(金馬郡) 호강왕(虎康王) 무덤 도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고려사절요》 충숙왕 해당 년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3월에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馬韓) 조상 호강왕의 능을 도굴했다. (도둑을) 붙잡아 전법사(典法司)에 구금했지만 달아났다. 정승 정방길(鄭方吉)이 전법관(典法官)을 탄핵하고자 했지만 찬성사 임중연(林仲沇)이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도적이 옥에 갇힌 지 2년이 되었지만 드러난 장물(贓物)이 없는데도 죽은 자가.. 2018. 1. 20.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3편 왕건, 죽어도 죽을 수 없던 神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며 기사 입력시간은 2016년 02월 22일 14시15분이다. 고려를 창건한 신라인 왕건은 고려 왕조를 개창한 까닭에 그 이름만 들으면 우리는 대뜸 ‘고려인’으로 단정하기 십상이지만, 실은 뼛속까지 신라인이다. 그가 태어나기는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이니 이해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877)이다. 청장년기를 신라에서 배반한 궁예에서 복무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발적 헌납이라는 형식으로 신라를 접수한 때가 59살 때인 935년이며, 그로부터 8년 뒤인 943년 향년 67세로 눈을 감는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왕건은 신라인이다. 이런 그가 고려라는 새로운 왕조 혹은 국가를 만들 때 그 절대적 토대는 신라의 그것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죽어 묻힌 곳을 현릉(顯.. 2018. 1. 20.
과학사가 전상운 원로 과학사학자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 별세 (연합뉴스/2018/01/19) 원로 과학사학자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 별세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60년 넘게 '한국 과학기술사' 연구에 매진한 원로 과학사학자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이 지난 15일 별세한 ... www.yna.co.kr 전상운 선생이 타계했다. 선생은 해방 이후 자생적인 제1세대 과학사가다. 김두종 이래 이 분야를 개척한 공로가 가히 절대적이다. 선생이 동시대, 혹은 이후 과학사가와 구별하는 특장은 그 자신이 자연과학도 출신이라는 점이다. 물론 근자에 들어와 각 분야에 걸쳐 해당 분야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주류는 인문학도다. 나 역시 굳이 분류하자면 인문학 전공자이거니와, 그런.. 2018. 1. 20.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2편 왕건, 날아라 슈퍼보드 툭하면 문을 따는 왕릉 도굴에 응전하는 사람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입력시간은 2016년02월01일 13시41분이다. 비봉 기슭의 절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우뚝 섰던 북한산 비봉 서쪽 기슭에 불광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서 북한산 봉우리 중 하나인 향로봉 정상을 향해 40분쯤을 올라가면 향림담(香林潭)이라는 작은 웅덩이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40m가량을 오르다가 갈림길 왼쪽으로 돌아가면 제법 넓은 대지가 나타난다. 이 일대에는 누가 봐도 그 옛날에는 제법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을 웅변하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제법 잘 남은 2단 축대가 있는가 하면, 7단인 돌계단도 있고, 대지를 비롯한 주변에는 건물 주초 혹은 탑과 같은 건축물 일부였을 법한 다듬은 돌들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더불어 기와에 대한 조예가 좀 있다면, 고려.. 2018. 1. 18.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1편 묻힌 다음날 털린 원 제국 공주의 무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다. 기사 입력은 2016년01월25일 12시16분이다. 근자에 《고려사절요》를 통독하며 고려사 500년을 훑다가 중·말기로 갈수록 짜증 혹은 분노가 치솟는 걸 보니 나 역시 어찌할 수 없는 한국 사람이다. 고려가 직접 지배나 다름없는 원나라 간섭을 무려 100년간이나 받으며 왕을 필두로 하는 고려인들이 갖은 굴욕을 감내해야 했던 데다 그 후기에 이르러서는 왜구가 주는 고통까지 덤터기로 썼으니 아마도 이때가 한국사 가장 참혹한 시대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감정은 비단 지금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줄로 안다. 굴곡의 근현대 한국이 겪은 참상이 아마도 고려 시대 그때로 오버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유의할 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나는 한국사가 이때만큼 세계를 향해 더.. 2018. 1. 18.
시신 도굴 미천왕, 그 영광과 비극 기사) 시신 도굴 미천왕, 그 영광과 비극 “고조가 아니라 증조다 기사 내용 수정 바람 미천왕은 광개토대왕의 증조부임 미천왕의 아들이 고국원왕이고 고국원왕의 둘째아들이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다 고조는 개뿔 고조는 미천왕의 아버지인 돌고가 고조임 수정 바람” 이 지적이 맞다. 아래 계보에서 보듯이 광개토왕에게 미천왕은 증조다. 고조라는 내 기사는 오류다. 미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고국양왕 – 광개토왕 – 장수왕 시신 도굴 미천왕, 그 영광과 비극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최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부친 묘 도굴사건은 지금으로부터 꼭 1657년 전인 고구려 고국원왕 12년, 즉 서기로는 342년 2월(양력으로는 3월)에 일어난 고구려 미천왕 시신 도굴사건과 흡사 닮아있다. 우리 역사상.. 2018.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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