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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515

작전회의보단 스테이크가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법 모처럼 집에 올라온 김에 책장에 쌓인 책들을 보다가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얻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어떤 장군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을 크게 도운 미군 장성 제임스 밴 플리트 James Alward Van Fleet ( (1892~1992) 라는 분이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공군 조종사였던 아들을 잃기도 한 그는 다른 미군 장성들보다 한국을 각별히 아꼈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는 꽤나 대식가였다고 한다. 스테이크를 좋아했는데 그 크기가 보통 사람들의 그것에 비해 두 배는 족히 되어야 만족했다나. 그것까진 좋은데 가끔 그의 요리사가 난감해할 때가 있었다. 한국군 장성들이 작전회의를 하러 그를 방문하곤 했는데, 회의라는 것이 늘 그렇듯 가끔 식사.. 2023. 1. 24.
개경에서 찬밥 먹는 날을 당한 송나라 상단과 탐라 사절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려시대에는 외국, 특히 중국 상인들이 빈번하게 개경을 드나들었다. 그런 만큼 고려 조정에서도 이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문종 9년(1055) 음력 2월 한식날, 불을 피우지 못하는 날이라 쫄쫄 굶고있을지도 모를 외국 상인들을 위해 고려 조정은 객관客館에서 거하게 식사대접을 하였다. 무신 한식寒食이므로 송宋 상인 섭덕총葉德寵 등 87인은 오빈관娛賓館에서, 황증黃拯 등 105인은 영빈관迎賓館에서, 황조黃助 등 48인은 청하관淸河館에서, 탐라국耽羅國 수령首領 고한高漢 등 158인은 조종관朝宗館에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 권7, 세가7 문종 9년 2월 이를 보면 송나라 사람들은 모두 240명이었고 탐라 사람들이 158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 무리의 대표자를 가장 먼저 쓰게 마련이므.. 2023. 1. 23.
그대의 종이 되겠나이다 vs. 너는 나의 신하일 뿐 청나라 시대를 다룬 중국 사극을 보면 가끔 주인공이 황제에게 자신을 일러 "노재奴才 아무개, 황상을 뵈옵니다!"라 하는 경우가 있다. '노재'란 글자 그대로 '종의 재주', '종이나 할 재주' 라고나 할까?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단어는 만주인만이 황제에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냥 한인 신하는 물론이고 한군팔기漢軍八旗 곧 만주족에 편제된 한인들도 자기를 일컬을 때는 신臣이라고만 해야 했다. 만약 그들이 자기를 '노재'라 한다면?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는 청나라 시절 관료들이 황제에게 올린 문서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거기에는 황제가 친히 붉은 먹을 적신 붓을 들어 댓글을 달곤 했다. 그런데 이를 보면, 한인 관료가 '노재 아무개'라고 썼을 때 강희제康熙帝는 '칭신稱臣이 가可하니라' 정도로 지나간 반.. 2023. 1. 22.
탐라 출신 관료, 대장장이 출신 관료 기록상 제주 출신으로 처음 고려의 과거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한 고유高維라는 분이 있다. 이 어른은 뒷날 정2품 우복야右僕射에 오를 정도로 출세했지만, 섬 사람으로써 겪는 차별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문종 11년(1057) 정월 정기인사의 한 장면을 보자. 기축 고유高維를 우습유(右拾遺, 종6품)로 삼았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고유는 탐라 출신이므로 간성諫省에는 합당하지 않은데, 만일 그 재주를 아깝게 여긴다면 다른 관직을 제수하길 요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우습유는 중서문하성의 종6품 관직으로, 높지는 않지만 간쟁諫爭과 봉박封駁을 담당하는 청요직淸要職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고유가 임명되자 중서문하성이 "탐라 사람은 사절하겠습니다"라고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문종은 그 말.. 2023. 1. 22.
거북등껍데기를 고려왕조에 바친 탐라국 문종 7년(1053) 2월, 개경에 멀리 탐라에서 온 손님이 도착했다. 뭔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이의 이름이...탐라국耽羅國 왕자 수운나殊雲那가 아들 배융교위陪戎校尉 고물古物 등을 보내어 우황牛黃·우각牛角·우피牛皮·나육螺肉·비자榧子·해조海藻·구갑龜甲 등 물품을 바치므로, 왕이 〈탐라국〉 왕자에게 중호장군中虎將軍을 제수除授하고 공복公服·은대銀帶·채단彩段·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 권7, 세가7, 문종 7년 2월고려시대에는 제주 소가 지금보다 더 유명했던 모양으로, 원 간섭기에는 탐라 소고기를 원나라 황제에게 꼬박꼬박 바칠 정도였다 한다. 전복과 비자, 미역이야 지금도 제주 명물로 유명하고, 거북이 등딱지도 제주가 섬인 걸 생각하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저러나 배융교위께서 얼마나 노안이었으면 이름마저 .. 2023. 1. 21.
백운거사, 소성거사를 만나다 원효대사元曉大師라고 하면 주무시다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득도했다는 일화(실제일 가능성은 적다고 하지만)나 개울에 발을 헛디뎌 이룩한 요석공주와의 로맨스로 유명할테지만... 원효라는 분을 그렇게만 평가하고 기억한다면 신라의, 나아가 한국 불교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 그분의 사상을 논하려면 책 하나로도 모자랄테니 넘어가겠지만 말이다. 그분이 파계한 뒤에는 머리를 기르고 중생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였다. 그는 신라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왕조가 바뀐 뒤에도 많은 이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머리 기른 원효 스님의 초상을 개인적으로 모셨던 스님도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의 술꾼 이규보 어른이 그 소성거사의 초상을 보고 글을 하나 올린 것이 있다. 내가 영聆 수좌首座 족.. 2023.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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