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探古의 일필휘지494 추사秋史와 일본도日本刀 섬이라는 지형상, 제주에는 바다에 나갔다가 표류하여 외국에까지 흘러가는 이가 적지 않았다.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겠지만,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동아시아 각국은 표류민에 상당히 관대해, 먹을 것을 내어주고 잘 대접한 뒤 고이 돌려보내주곤 했다. 우리의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제주에 머무를 때도 그런 과정을 거쳐 일본에서 돌아온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추사의 제자 박혜백朴蕙百이 어쩌다 그런 사람을 만났는데,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몰라도 그가 사무라이들이나 갖고 다니는 일본도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수를 썼는지 그가 그 칼을 얻어와서 스승 추사에게 보여드렸다. 붓의 대가 추사와 '니뽄도'라니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있나 싶지만, 사실 추사는 일본 칼이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 2022. 3. 7. 백송白松 지창한池昌翰, 그 사람이 사는 법 관북關北이라 불린 함경도 일대는 옛부터 무사들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 그 이유로 흔히 높고 험준한 산이 많은 자연환경, 여진족이 틈만 나면 쳐들어오는(원래 함경도 땅의 상당수가 여진족의 터전이기도 했으니까) 사회환경을 들곤 한다. 그런데 그 말인즉슨, 문인이나 예술가가 나타나기는 어려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성계가 태어난 용흥지지龍興之地였음에도 조선왕조 500년 내내 함경도 출신 과거합격자는 드물었고 관료가 된 이들은 더더욱 적었다. 같이 차별받았음에도 관서關西 평안도와는 달리 19세기 함경도 문인들은 자신들이 차별받는 현실에 체념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는데, 여러 모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장유승 선생님의 라는 논문을 참조바란다. 이런 모습이 180도 달라지는 게 이른바 근대 개화기의.. 2022. 2. 20. 고려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다 27년(1073) 정월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법전[令典]을 살펴보건대 ‘공장(工匠)과 상인(商人)의 집안은 기술을 가지고 윗사람을 섬기니, 그들의 업(業)에 전념할 것이며, 관직에 올라 선비[士]와 나란히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군기주부(軍器注簿) 최충행(崔忠幸)과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 양운(梁惲)은 모두 공장의 외손이며, 별장(別將) 나례(羅禮)와 대정(隊正) 예순(禮順)도 역시 공장의 적손(嫡孫)인데 스스로 조정(朝廷)의 관리[九流]을 흠모하여 그 업을 던져버리고 이미 조정의 반열에 올라왔으니, 다시 공장으로 충원할 수는 없사오나, 바라건대 각자 지금의 직책으로 제한하시고 옮겨 제수(除授)하는 것을 허용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신해년(1071)에.. 2022. 2. 3. 개화기의 잉글리쉬 스터디 1880년대, 영어를 가르치는 교육기관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이 땅에 처음 만들어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엔 교사가 흑판에 글씨를 쓰면 해설자가 그 뜻을 우리말로 풀어 얘기하고, 학생들은 붓으로 그걸 옮겨적었다고 한다. 2022. 1. 16. 수연壽硯 박일헌朴逸憲의 난초 부채 연구자가 자기 연구대상에 알게 모르게 애정을 갖게 되는 건 인지상정일까? 물론 그것이 지나쳐 연구대상을 무조건 숭배한다거나 흠을 덮어둔다거나 하는 일은 경계해야겠지만, 연구자도 사람인 이상 대상을 알아갈수록 정을 쌓게 되는 부분은 있는 것 같다. 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말이다. 만약 나에게 그런 대상이 있는가 물으면, 고민하다가 "최근 이 작가에게 관심이 생겼습니다."라고 할 것 같다. 수연壽硯 박일헌(朴逸憲, 1860-1934. 을 토대로 생년을 1861년에서 1860년으로 수정한다). 아들 호운湖雲 박주항朴疇恒과 함께 당대엔 난초로 이름깨나 날렸지만, 최근까지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던 근대 서화가다(올해 이 사람을 다룬.. 2022. 1. 16. 일타강사 장지연 선생 일타강사 장지연 선생 다시 또 약간의 짬이 나서 를 뒤적거리던 중, 재밌는 광고를 하나 발견했다. 일요일 빼고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지리, 한문 두 과목을 강연하고 토론하려 하니 중등학교 이상, 뜻있는 학생들은 왼쪽의 주소로 찾아오라는 내용. 근데 그렇게 학생을 모으는 분이 '장지연'이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낙양의 종이값을 올렸던 위암 선생이 그로부터 4년 뒤, 1909년 무렵엔 이런 일을 하고 계셨던가 보다. 하기야 같은 교과서도 만들었던 분이니 강의는 퍽 들을 만 했으리라. 2021. 12. 3. 이전 1 ··· 57 58 59 60 61 62 63 ··· 8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