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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42

'좌우지장지지'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峯(1908-1991)의 글씨 1. 좌우지장지지지를 떠올리면 옛날 사람. 2. "늙어감에 장차 이르는 줄 알지 못하는 집"이라! 어쩐지 신선이 살 것만 같은 이름이다. 왜 속담에도 있잖는가,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언뜻 들어서는 도가풍이 물씬 풍긴다. 하지만 이 이름의 근원은 다. 유학의 성인 공자孔子의 언행을 모은 그 말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로子路라고, 성격이 퍽 드센 분이 있었다. 근데 섭공葉公이란 사람이 자로에게 "공자란 어떤 분이오?"라고 물었던 모양. 자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공자께서 가라사대,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자네 왜 이렇게 말해주지 않았는가? '그 사람됨은 학문에 발분하면 밥 먹는 것을 잊고, 학문을 즐김에 시름을 잊으며, 늙어감에 장차.. 2020. 12. 24.
염치 불구하고 빈 술동이를 보내니 담아주소서..아버님이 자시고 싶다기에.. 존경하는 페친 박진우 선생님 포스팅을 보다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싶어하는데, 성균관 근처에서 파는 술은 영 맛이 떨어지니 염치없지만 댁에서 담근 술을 한 동이 걸러서 보내달라는 옛 간찰 속 이야기였다. 오죽 아버님이 술을 좋아하셨으면...그리고 아들이 얼마나 효성스러웠으면(어쩌면 아버님이 빨리 술 좀 받아오라고 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나) 이런 간찰을 써서 보냈겠는가.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왜 성균관 술맛 얘기를 했을까? 그 간찰을 쓴 이만상(1622-1645)이란 분이 뉘신지 알고 보니 이해가 간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 중기 한문 4대가 중 하나로 꼽히는 월사 이정구(1564-1635)요, 아버지는 대제학을 지낸 백주 이명한(1595-1645)이다. .. 2020. 12. 24.
전천후 친일파 박영철朴榮喆의 일본 찬양시 *** 이하는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강민경 선생 글이다. 1.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1879~1939)만큼이나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다. 그는 전주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대한제국의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갔고, 일본 육사 15기로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강제합병 뒤 1912년 일본 육군 소좌로 전역한 박영철은 강원도지사와 함경북도지사, 삼남은행장, 조선상업은행 부은행장과 은행장, 경성방송국 이사,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조선맥주주식회사 취체역(지금의 이사)을 거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올랐던, 당시로서는 입지전적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딸 배정자와도 같이 살았고, 3.1운동을 비난했으며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기도 했던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 2020. 12. 23.
동파거사 담배 배우시다 소식: 웩! 퉤퉤, 아니, 이 요망한 건 뭐냐? 오상순: 아 선배님도, 이게 담배 아닙니까 담배. 술 한 잔 걸치면 이놈을 뺄 수 없지요. 아 아니 그런가 횡보! 염상섭: 허허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송나라 때는 아마 담배가 없었지 무애? 양주동: 그렇지요. 중국으로 치면 명나라 때 들어오니까, 그땐 남쪽에서 오는 신령한 풀이라고 했다지요. (라이터를 키며) 선배님이 아직 이 맛을 모르셔서 그렇지 익숙해지면 술만큼 자주 찾을 겝니다. 아니 그런데 노산 이 친구는 왜 안오누? ㅡ 이 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딸깍딸깍 발소리. 손에는 자기 문집과 술 큰 거 한 병을 들고 있는 이은상이다. 이은상: 동파 선배님이 계시다구? 어디, 어디 계시는가? 이 시를 보여드려야는데! by 강민경 2020. 12. 23.
주선시불회합도酒仙詩佛會合圖 이규보: "제가 왕년에 주필이당백이라 이름 좀 날렸습니다, 어흠!" 정철: "선배님보다야 못하지만 저도 술과 시라면 빠지지 않지요!" 이백: "호오, 제법이로다." 변영로: "아이고~선배님들, 저를 빼놓고 여기 계시면 어떡합니까 ㅠㅠ" ㅡ 수주 선생은 소주병을 들고 뛰어들어온다. 이상 강민경 선생 글 그림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회의를 진행했단 말이 있다. 어차피 말이 필요했겠는가? 쏼라쏼라 헬레헬레였으니 말이다. 2020. 12. 23.
글이 안 되자 붓을 던져버린 최온崔昷 고려 중기를 살았던 최온崔昷(?∼1268)이란 사람이 있었다. 당대 문벌인 철원 최씨 출신으로 그 자신 재상까지 올랐던 사람이었는데, 자기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좋게 말하면 문벌답게 행동한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콧대높은 안하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문한관이 되어 임금의 문서를 담당하는 고원誥院에 들었다. 그때 이순목李淳牧, 하천단河千旦이라는 이들이 같이 근무했는데, 그들은 지방의 향리 출신이었다. 그러니 최온의 눈에 찰 리가 있나. 서로 경이원지하던 중... "이웃나라에서 견책譴責하려 보낸 조서詔書에 대한 답서答書를 작성하여 올리라는 명령이 있어, 최온이 붓을 잡았는데, 머리를 긁으며 고심을 해도 뜻대로 글이 되지 않자 붓을 집어 던지고 욕을 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시골구석의 포.. 2020.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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