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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51

이규보의 꿀벌론 바쁜 벌꿀은 슬퍼할 틈도 없다던가, 고려시대에도 벌은 꿀을 따느라 바빴던 모양이다. 우리의 백운거사 이규보도 벌을 보고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었던지, 나름의 꿀론, 벌론을 펼친 적이 있었다. 술꾼의 벗 숙취를 가라앉히기 위해 꿀물을 많이 타 잡수셨을테니 더욱이 감회가 깊었으리라. 꽃을 따서 꿀을 만드니 엿과도 비슷하도다 기름과 짝을 이루니 그 쓰임 끝이 없도다 사람들 적당히 거두지 않고 바닥을 드러내야 그만둔다 네가 죽지 않는다면 인욕이 어찌 그치랴 ㅡ 전집 권19, 찬, "꿀벌찬" 2020. 12. 29.
졌지만 항복은 못해! 바둑 불복 이규보 1) 이규보는 바둑도 그럭저럭 두었던 듯 싶다. 하지만 바둑이 늘 그렇듯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던 모양. 대국에서 한 번 크게 지고 상대에게 지어준 시가 전한다. 상대를 '어른'이라 한 걸 보면 연장자였던 것 같은데, 먼저 시를 지어서 놀리니 이규보 체면에 가만 있을소냐. 그 시에 차운하여 화답하기를... 다행히 봄날이라 해가 길기도 하나니 / 幸是春天日正遲 곧장 통쾌히 싸워 자웅을 결단하였소 / 直須快戰決雄雌 이겼다고 무쌍의 솜씨라 자부하시지만 / 捷來雖負無雙手 졌다고 어찌 한 번 이길 기회 잊겠소 / 敗去寧忘借一期 왕방처럼 맹렬한 들불을 놓으려 하니 / 欲放王逄橫野火 도개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방망이가 되지나 마오 / 莫成到漑兀風椎 그대에게 묻나니 이미 판가름 났다고 항복하랴 / 問君已辦降旗不 이야말.. 2020. 12. 28.
하늘에서 술이 비처럼 내려와 권2에 이런 시가 있다. 제목은 "술을 보낸 벗에게 사례하다". 근래엔 술마저 말라버려 / 邇來杯酒乾 이것이 내 온 집안 가뭄이었는데 / 是我一家旱 감사하구려 그대 좋은 술 보내주어 / 感子餉芳醪 때맞춰 내리는 비처럼 상쾌하네 / 快如時雨灌 이규보가 느낀 희열이 스무 자 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2020. 12. 28.
'좌우지장지지'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峯(1908-1991)의 글씨 1. 좌우지장지지지를 떠올리면 옛날 사람. 2. "늙어감에 장차 이르는 줄 알지 못하는 집"이라! 어쩐지 신선이 살 것만 같은 이름이다. 왜 속담에도 있잖는가,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언뜻 들어서는 도가풍이 물씬 풍긴다. 하지만 이 이름의 근원은 다. 유학의 성인 공자孔子의 언행을 모은 그 말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로子路라고, 성격이 퍽 드센 분이 있었다. 근데 섭공葉公이란 사람이 자로에게 "공자란 어떤 분이오?"라고 물었던 모양. 자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공자께서 가라사대,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자네 왜 이렇게 말해주지 않았는가? '그 사람됨은 학문에 발분하면 밥 먹는 것을 잊고, 학문을 즐김에 시름을 잊으며, 늙어감에 장차.. 2020. 12. 24.
염치 불구하고 빈 술동이를 보내니 담아주소서..아버님이 자시고 싶다기에.. 존경하는 페친 박진우 선생님 포스팅을 보다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싶어하는데, 성균관 근처에서 파는 술은 영 맛이 떨어지니 염치없지만 댁에서 담근 술을 한 동이 걸러서 보내달라는 옛 간찰 속 이야기였다. 오죽 아버님이 술을 좋아하셨으면...그리고 아들이 얼마나 효성스러웠으면(어쩌면 아버님이 빨리 술 좀 받아오라고 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나) 이런 간찰을 써서 보냈겠는가.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왜 성균관 술맛 얘기를 했을까? 그 간찰을 쓴 이만상(1622-1645)이란 분이 뉘신지 알고 보니 이해가 간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 중기 한문 4대가 중 하나로 꼽히는 월사 이정구(1564-1635)요, 아버지는 대제학을 지낸 백주 이명한(1595-1645)이다. .. 2020. 12. 24.
전천후 친일파 박영철朴榮喆의 일본 찬양시 *** 이하는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강민경 선생 글이다. 1.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1879~1939)만큼이나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다. 그는 전주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대한제국의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갔고, 일본 육사 15기로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강제합병 뒤 1912년 일본 육군 소좌로 전역한 박영철은 강원도지사와 함경북도지사, 삼남은행장, 조선상업은행 부은행장과 은행장, 경성방송국 이사,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조선맥주주식회사 취체역(지금의 이사)을 거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올랐던, 당시로서는 입지전적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딸 배정자와도 같이 살았고, 3.1운동을 비난했으며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기도 했던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 2020.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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