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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519

유리건판을 보다가, 경성 오다 쇼고[小田省吾]의 집 가끔은 조선총독부박물관 직원들이 왜 이런 걸 다 찍어놓았을까 하는 자료도 만나게 된다. 이 사진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숙명여전 교장 등을 역임하고 , , 등의 편집을 도맡았던 동양사학자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의 집 현관이다. 눈발 흩날리는 날 찍었는지 지붕이며 길바닥에는 옅게 눈이 쌓여있고, 희끗희끗한 눈송이가 찰칵 소리에 영원히 담겼다. 대문 옆에 뭔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는데, 확대해서 읽어보니 꽤나 흥미롭다. 오른쪽 맨 위부터 보면, 당연히 집주인 오다 쇼고의 이름 넉 자가 붙었다. 그 아래에는 전專 뭐라고 썼는데 잘 안보이고, 그 아래에는 경성중학교삼급(?)京城中學校三級(?) 오다 實(미노루인지 마코토인지)이란 이름이 보이는데, 오다 상의 아들인가 싶다. 왼쪽으로 건너와서 위를 보면.. 2021. 8. 23.
나도 이렇게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 이규보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의 경우 코로나-19가 이렇게 온 세상을 뒤덮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길을 막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숨 쉬듯이 여행 다니던 사람들은 야속한 바이러스를 원망하다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예전 여행 사진들을 보면서 지친 마음을 달래곤 한다. 아 저때는 저기를 갔었지, 이때 여기 음식이 참 좋았는데 하면서. 800년 전을 살았던 아저씨 이규보도 여행을 다녔던 적이 있다. 물론 공적인 임무를 띈 출장이었지만, 출장 가는 길에 여러 고을 명소를 둘러보았고 그 분위기를 느끼곤 했다. 옛 수도 풍치가 남은 전주, 중국 가는 길이 멀지 않다는 변산, 고구려에서 날아왔다는 전설이 담긴 비래방장飛來方丈,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올라간 원효방元曉房과 불사의방不思議房… 이규보는 그때의 여행을 “남행월일기”라는 기록으로.. 2021. 8. 22.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 평보 서희환(1934-1995) 1. 최근 덕수궁미술관과 예술의전당에서 모두 한국 근현대 서예를 조망하는 전시를 했었다. 적어도 이 두 전시에 작품이 나온 이들은 한국 근현대 서예의 거목으로 인정받았다고 하겠다(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있겠으나). 그 중 평보 서희환(1934-1995)이라는 분이 계신다. 34년생이니 지금 살아있어도 여든여덟이다. 그러나 당당히 그 스승뻘인 이들과 함께 회고의 대상이 되어 두 전시에 모두 나왔다. 2. 서희환은 소전 손재형(1903-1981)에게 배웠다. 국전에 네 번 연속 특선으로 뽑히고 1968년에는 로 대통령상을 받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에겐 독이었다. 스승의 글씨체를 본뜨다시피 한 를 두고 국전 심사의 공정성 문제, 소전의 국전 심사 독주에 대한 비판이 대두했던 것이다. 이 .. 2021. 8. 15.
연산이시여, 애는 썼습니다만 연산군 말기, 왕이 조정 신료들에게 새 사모紗帽의 견본을 내린다. 그리고 가라사대 ㅡ "앞에는 '충忠'자, 뒤에는 '성誠'자를 전서체를 써서 새겼으니 대개 신하된 자로 하여금 늘 충성을 품으라는 것이다. 또 사모의 두 뿔을 내려 어깨 위로 늘어뜨리도록 했으니 임금이 위에서 아래를 제어하라는 뜻을 드러냄이로다." 애는 썼다만, 이로부터 1년도 안 되어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2021. 8. 15.
꽃 꽂은 노인 강감찬 강감찬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포로와 노획물을 바치니 왕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임시로 만든 채색 누각에 풍악을 준비하여 장사들을 위한 잔치를 열어 주었으며, 금으로 만든 꽃 여덟 가지를 몸소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왕이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서 위로와 감탄의 말을 그치지 않으니, 강감찬은 큰 절로 감사를 올리며 몸 둘 바를 몰랐다. 강감찬 열전에 기록된 한 장면이다. 이 부분이 워낙 인상깊었는지 후대의 사서들에서 강감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2021. 8. 7.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 vs.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같은 글인데, 구두점을 다르게 찍으니 묘하게 뜻이 달라졌다. 과연 어느 것이 추사 선생의 의도에 가까울런지. 2021.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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