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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374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별전에 즈음해 모은 사진들 무령왕릉은 발견 발굴이 1971년이니 그 30주년은 2001년이었다. 당시 국립공주박물관이 발굴단인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관련 특별전과 학술대회를 준비했다. 학술대회는 공주문예회관에서 열렸다. 이 행사를 미친 듯이 준비한 이가 당시 공주박물관 학예사 정상기였다. 이 특별전은 나로서도 잊지못할 인연이 있다. 정상기만큼이나 열성적으로 이때를 준비한 것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 턱별전을 준비하는 정상기의 고민 중 가장 큰 것이 발굴당시를 증언하는 생생한 사진이었다. 당시 발굴은 무덤내부 사진을 찍기는 했지만 발굴단에서 촬영한 사진은 단 한장도 건지지 못했다. 당시 내부 촬영을 맡은 이가 문화재연구실 학예사보 지건길. 한데 이 양반이 아사히펜탁스 사진기 조작을 잘못하는 바람에 신나게 찍은 사진은 단 한장도 건지.. 2021. 1. 10.
광화문 현판 관련 문화재위 심의(2012) 광화문 현판 글씨, 문화재위원회 합동분과 심의 선정 문화재위원회 합동분과(위원장 노중국/사적, 건축, 동산, 근대문화재분과)는 27일 오후 2시부터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서울 종로 효자로)에서 광화문 현판 글씨 선정을 위한 회의를 열어 광화문 현판을 경복궁 고종 중건 당시의 임태영(任泰瑛) 한자 현판인 ‘光化門’으로 하기로 심의하였다. (2012. 12. 28) *** 이게 당시 문화재청 발표 전문이다. 문화재 바깥에서 볼 적에야 여러 생각이 있을 순 있지만 문화재 복원원칙에서 한글 간판은 지원자격이 없다. 따라서 이 건은 문화재위 심의 안건에 부칠 필요조차 없는 사안이었다. 실제 회의 결과서도 얼이 빠진 위원 딱 한 명만 한글로 바꿔야 한다는 데 표를 던졌을 뿐이다. 덧붙이건대 광화문 현판을 한자를 달자.. 2020. 12. 29.
명저는 누구나 알아보는 법 시키지 않았다. 어머 이거 단장님 책이에요? 언제 쓰신 거에요? 20년 전이요? 어머 표지가 지금 봐도 산뜻해요 호호호호 인턴 계약이 종료해서 복학하는 친구 밥 사주고 들른 북카페서 저 위대한 책을 발견했다. 초상권은 대강 보호했다. 2020. 12. 22.
기자가 협박해 나온 경주 조양동 발굴보고서 2000년 무렵부터 발굴보고서 미간에 내가 각종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했거니와 그에 굴복해 뒤늦게 나온 발굴보고서 중 조양동보고서가 기억에 남기에 이를 전한 당시 내 기사를 전재한다. 증언하건대 이 조양동보고서는 발간자가 김태식이다!!! 내가 협박해서 나온 것이다!!! 그 내력을 본다. 우선 아래 기사는 발굴보고서 1차분이 나왔다는 소식이다. 2000년 8월이다. 2000.08.30 10:18:23 경주 조양동 발굴보고서 21년만에 발간 (경주=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BC 57년 신라 건국 이전 경주 상황을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조는 "일찍이 조선(고조선)의 유민(遺民)들이 이곳에 들어와 계곡에다 각기 6촌락(村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고 하고 있다. 혁거세는 이들 촌락을 통합해 신라.. 2020. 12. 7.
뒤늦게 풍납토성 배경으로 찍은 사진 언제쯤인가? 2001년 졸저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김영사) 발간 직후일 것이다. 미디어오늘인지 날 취재하고는 풍납토성을 배경으로 한 사진 있음 달라 했다. 한데 그때까지 정작 내가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내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더라. 이후에는 더러 일부러 그런 사진을 찍었다.  한데 이후 그런 사진을 요청한 데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사진은 2008년 5월 7일 경당지구를 한신대박물관이 재발굴하고, 그에서 다시 44호 건물지를 재노출했을 적이다. 이 건물지는 아직 그 성격이 오리무중이다.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다. 혹자는 종묘 혹은 그에 비견하는 신전 건축물로 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단일 뿐이다. 바닥은 숯을 깔아, 시멘트처럼 단단히 쿵쿵 소리가 났다. 그 인접 지점 토.. 2020. 12. 5.
2013년 연천 군남댐 건설예정지에서 2010년 3월 25일이 아닌가 한다. 연천 홍수조절용 군남댐 건설 예정지 발굴현장이다. 수자원공사 의뢰로 고려문화재연구원이 발굴했을 것이다. 김병모 선생이 중앙일보 이경희를 비롯한 일군의 기자를 앞세워 놓고 열심히 발굴성과를 설명하지만, 나는 혼자 놀았다. 왜? 나는 대가大家라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 이 군남댐이 올해 유감없는 위력을 발휘했다. 저때만 해도 왜 굳이 홍수조절용댐인가 하는 반론이 적지 않았으나 유례없는 올해 폭우에 제 구실 톡톡히 했다. 모든 대규모 토목공사는 당대엔 언제나 욕만 쳐먹기 마련이다. 먼 후세 칭송받지 아니하는 토목공사 없더라. 2020.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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