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404

아래 유스티니아누스 판데믹에 대하여 유스티니아누스 판데믹에 대한 김단장님 글에 약간 더한다. 유스티니아누스 판데믹은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구 의학사 연구자들에게는 꽤 유명한 것으로, 1. 유스티니아누스 판데믹2. 유럽중세 흑사병3. 19세기 말 중국 광동성 흑사병이 셋은 서로간에 밀접한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이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 중 세 번째, 중국 광동성 흑사병에서 페스트균이 분리되어 처음으로 페스트 Y . pestis가 알려졌고, 이 페스트 균이 중세 흑사병도 유발했을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어 오다가, 얼마전 당시 인골에서 페스트균이 분리되어 중세 흑사병도 페스트에 의한 것임이 확정된 바 있었고, 이번에 유스티니아누스 판데믹에서 페스트균이 확정되었다 하므로 당초 추정하였던 것처럼 고대, 중세, 근대의 큰 판데믹 세 .. 2025. 8. 28.
[연구소식] Korean Mummies of the Joseon Kingdom 이제 공개할 때가 된것 같아 포스팅한다. 필자가 주편집자로 오창석, 홍종하 교수가 함께 편집에 참여한 "Korean Mummies of the Joseon Kingdom"이 길고 긴 편집작업을 마치고 조만간 최종 출판에 들어간다. 올해가 가기 전에 여러분들 앞에 완성본으로 소개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으로 필자의 조선시대 미라 연구 작업은 큰 종결부를 찍는다. 참여해주신 모든 공저자 분들께 깊은 감사를 올린다. 2025. 8. 28.
구한말의 조선과 검안檢案 서류 필자가 조선시대 호적과 족보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필자가 앞으로 수행할 연구의 밑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현재 조선시대 검안서류의 의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바, 검안서류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훌륭한 연구가 많이 수행되어 있기 때문에필자가 더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서류의 시장, 즉 검안 서류에 대한 의학적 분석이 미비한 바 이에 대해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 검안서류의 이해를 위해서는 당시 사회에 대한 검토가 중요하다. 사망자가 왜 죽었는지 다양한 증언과 취조가 나오는 과정에서 구한말의 조선사회가 역력히 드러나는 바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학의 많은 연구가 있었다. 필자는 조선시대 17 -19세기까지의 사회적 변동을 일차적으로호적과 족보를 통해 대략 살.. 2025. 8. 28.
한일 학계가 주목해야 할 야요이 농경의 기원 "신석기 농경혁명은 농경민 외부 유입에서 비롯" "신석기 농경혁명은 농경민 외부 유입에서 비롯""끼리끼리 놀아, 수렵채집인에 준 영향 미비" 고대 DNA 분석 결과, 이주를 통해 농경이 확산되었지만 지역 주민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드러났다BY Adrienne Berard, 펜실베이니historylibrary.net 목하 김단장께서 포스팅 한 위 연구는야요이시대의 개시와도 관련하여 음미할 부분이 많다. 최근 동아시아도 DNA연구의 결과 야요이인의 기원과 관련하여 상당한 부분이 밝혀졌고위와 거의 비슷한 결론으로 달려가고 있는 바, 우리 학계도 이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때라 하겠다. 2025. 8. 28.
양반 수포收布, 그 실패가 부른 파장 우리나라 조선 후기에양반이 군역을 지는 개혁이 완수되었으면아마 19세기에 모든 사람이 유학으로 끝나는 모습은 보지 않읗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균역법 군포 대상자가 양반 직역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양반의 말단- 중인-부농까지 군포를 부과하고 선무군관을 부여하는 정도에 그쳐 결국 군역의 완전한 회피를 위해 양반의 상징인 유학의 모칭이 계속 되었고 이 때문에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모든 사람이 유학을 칭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양반의 특권이 완전히 종식되지 못한 것이 양반에 대한 모칭을 계속 불러왔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후기에 가장 드라마틱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서얼-중인-부농으로 구성된 집단인데이들은 양반의 말단 내지는 중인, 부농으로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 2025. 8. 28.
조선시대 호적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 (보유) 첫째. 우리나라 조선시대 호적에는 1770년대까지도 노비 사역이 완전히 청산 안 되었다. 아래에 노비 10여명씩 두고 사역하는 양반들이 이때까지도 드물지 않다. 물론 이전 시기보다는 노비 사역 규모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둘째. 우리나라 호적은 1800년대 중반 들어가면 노비사역이 거의 사라진다. 이때가 되면 3-5명 단위의 소농으로 나라 전체가 재편되는 듯 하다. 이 부분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세째. 그런데 문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 이 시기 호적이 개판이다. 필자는 족보를 가지고 대조해봤는데대체로 1/5도 호적에 안 올라온 것 같다. 이처럼 엉망인 호적이 19세기 중반되면 좀 나아지는데 이 시점이 되면 거의 모든 가구가 유학이 된다.. 따라서 노비사역이 중심이 된 시대와 소농으로 완.. 2025. 8. 28.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