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1894 광개토왕비의 "신래한예": 동부여는 어디인가? (2) 광개토왕비에 의하면 광개토왕릉 수묘는 왕이 정복전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쓰도록 했다. 이에 관하여 비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바로 "신래한예"인데 어딘가의 정복전에서 잡아온 사람들일진데, 앞의 "한"은 분명히 백제에서 잡아온 사람들일 터, 문제는 뒤의 "예"가 어디서 잡아온 사람들일까? 광개토왕비 정복전을 보면, 신래한예의 "예"에 딱 맞는 사람들은 동부여 외에는 없다. 396년: 백제 토벌 398년: 식신 토벌 399년: 신라원조 404년: 왜와 대방에서 전투 407년: 확실치 않은 지역에서 전투 410년: 동부여 정벌 그렇다면 동부여가 "예"일까? 신래한예의 "예"는 두만강 유역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까? 사실 이 동부여에 대해서는 그 실체가 두만강 유역이 아니라 삼국지의 "동예"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을.. 2023. 4. 13. 고려시대에도 개미는 있었다 개미보다 더 작은 것은 없건마는 / 微莫微於蟻 벌레를 끌고 잘도 달아나는구나 / 曳蟲猶善走 크거나 작거나 모두 똑같이 보니 / 大小若等視 범이 온갖 짐승 제압하는 것 같도다 / 如虎制百獸 - 후집 권10, 고율시, "개미가 벌레를 끌고 가다 쌍운 蟻拖蟲 雙韻" 2023. 4. 13. [무령왕릉과 쌍릉 사이, 백제 장인들의 눈물겨운 생존투쟁] 일신한 치석治石 기술, 전대미문하는 무덤 집을 만들다 그렇다 해서 하루아침에 없던 기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전축분을 이식·습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이 부족한지는 분명히 드러났다. 그 이전 우리는 명색이 치석治石이라 하지만 구석기 시대 그 기술을 벗어나지 아니해서 가공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돌맹이를 주어다가 새로 쌓았을 뿐이니 그건 치석이 아니라 실은 재배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문제는 바로 이거다. 말 그대로 돌을 가공하자! 이 정도는 공정이 하나 더 늘고 공사 단가가 높아지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차피 우리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우리 가치를 스스로 높이는 것이기에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해서 어느 순간 백제 엔지니어들이 돌을 가공하기 시작했다. 돌덩이는 애초 쓰임새를 염두에 두고 잘라내고, 그것은 다시금 .. 2023. 4. 13. 광개토왕비: 동부여는 어디인가? (1) 광개토왕비에는 "동부여"가 나온다. 동부여는 흥미로운 나라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동부여가 없다. 동예, 옥저, 읍루까지 나오는데 동부여는 없다. 현재 한국학계 통설에서는 동부여란 연변 지역이다. 여기 있었다면 왠만하면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이 나올 것 같은데 없다. 현재 동부여 위치를 두만강 하류 일대에 비정한 지도를 보면 동부여 위치가 옥저하고 읍루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런데 삼국지를 보면 옥저와 읍루 사이에는 동부여가 없고 두 세력은 서로 접경하고 있다. 동부여는 한국측 기록에만 나오는 실체이다. 필자가 아는 한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이 거의 유일하다. 그렇다면 동부여라는 나라는 그 실체가 모호한 것 아닌가 싶은데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광개토왕비에 동부여가 나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나온다.. 2023. 4. 13. [무령왕릉과 쌍릉 사이, 백제 장인들의 눈물겨운 생존투쟁] 협잡과 혁신, 위기의 양 날개 전축분 도입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백제 장인들한테는 일대 위기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이런 좌절 분노을 딛고서 막상 모습을 드러낸 그 전축분 왕릉이었다. 어랏? 우리가 그렇게 전축분은 안 된다고 그렇게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막상 완공에 즈음해 드러낸 그 모습을 보고는 또 한 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들한테는 주마등처럼 그네들이 이 전축분 이전에 그네들이 만든 다른 왕릉과 오버랩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모습을 드러낸 그 벽돌집 왕릉은 누가 봐도 그네들이 지금껏 만든 그것과는 도대체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뽀대가 났다. 우리가 봐도 폼이 나기는 하네, 이런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랬다. 겉으로는 중국 놈들이라 해서 별 다를 것도 없다 했지만, 그네들 무덤 만드는 기술은 분명 우리보다.. 2023. 4. 13. 세형동검이 수 백개는 녹아 들어갔을 성덕대왕신종 우리나라는 알다시피 구리가 잘 안 난다. 청동기시대 위세품으로 동검과 함께 석검이 많이 쓰인 것도 그런 이유일 터다. 뭔가 폼잡을 게 필요한데 구리가 워낙 안 나다 보니 석검으로 만들어 차고 칼자루만 세형동검처럼 위장하지 않았을까. 지난 주말에 학회를 참석하고 시간이 남아 경주박물관을 들렸다. 성덕대왕신종이 보였다. 그 규모에 새삼 놀라면서도 도대체 저 구리가 어디서 났을까 궁금해졌다. 아마 구리를 사오기도 했겠지만, 전해 오는 고물 청동기물도 많이 저 종 안에 녹아들어가지 않았을까. 에밀레 종 전설처럼 스님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았을때 아마 돈을 내놓고 전답을 내놓은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청동기물을 내 놓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내 생각에 성덕대왕 신종에는 그때까지도 전해오던 세형동검 수 백.. 2023. 4. 13. 이전 1 ··· 1850 1851 1852 1853 1854 1855 1856 ··· 3649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