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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광개토왕비의 "신래한예": 동부여는 어디인가? (2)

by 초야잠필 2023.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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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에 의하면 광개토왕릉 수묘는 왕이 정복전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쓰도록 했다. 

이에 관하여 비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바로 "신래한예"인데 어딘가의 정복전에서 잡아온 사람들일진데, 

앞의 "한"은 분명히 백제에서 잡아온 사람들일 터, 문제는 뒤의 "예"가 어디서 잡아온 사람들일까? 

광개토왕비 정복전을 보면, 신래한예의 "예"에 딱 맞는 사람들은 동부여 외에는 없다. 

396년: 백제 토벌
398년: 식신 토벌
399년: 신라원조
404년: 왜와 대방에서 전투 
407년: 확실치 않은 지역에서 전투 
410년: 동부여 정벌 

그렇다면 동부여가 "예"일까? 신래한예의 "예"는 두만강 유역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까? 

사실 이 동부여에 대해서는 그 실체가 두만강 유역이 아니라 삼국지의 "동예"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정다산과 이병도이다. 이 두 양반은 동부여가 "동예"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는 광개토왕비 "신래한예"의 "예"가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라고 본다면, 광개토왕비의 동부여 정벌은 두만강 쪽을 친 것이 아니라 함경남도-강원도 일대를 공격한 셈이 되겠다. 

일견하여 황당해 보일지도 모르겠다만, 의외로 이렇게 설명하면 해명이 되는 부분이 많다. 

1. 우선, 전통적으로 동부여 도읍지로 이야기 되던 "가섭원"은 그 위치를 "강원도 강릉"일대로 보던 것이 조선시대까지도 일반적이었다. 

2. 광개토왕비문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는 고구려 측의 프로파간다로 동부여는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하지만 동부여를 동예라고 생각하면 훨씬 이야기가 단순해진다. 동예를 보자.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衛滿>, 結夷服, 復來王之. <漢><武帝>伐滅<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 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 其人性愿慤, 少嗜欲, 有廉恥, 不請(句麗)[ ].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漢>末更屬<句麗>.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捐棄舊宅, 更作新居. 有麻布, 蠶桑作 . 曉候星宿, 豫知年歲豊約. 不以珠玉爲寶.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少寇盜.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 樂浪檀弓出其地. 其海出班魚皮, 土地饒文豹, 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 {臣<松之>按: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詣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 供給役使, 遇之如民. 


재미있지 않나? 동예는 원래 조선 땅이다가 조선 멸망후 한사군에 속하며 동부도위가 되었다가 반독립상태로 되었다. 이후 "고구려에 속한 적이 잇는데" 이를 다시 군현이 정벌하여 이에 속하게 된 것이다. 

동예는 "고구려에 한 번 들어갔다가" 정시 6년 이후  (245년) 군현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광개토왕비의 "속민이었다가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은" 동부여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나? (계속)

정약용과 이병도는 동예를 동부여라 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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