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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지지(括地志)》 애초 전 550권이며 서략(序略) 5권이 더 있었다. 당초(唐初)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넷째 아들로 위왕(魏王)에 책봉된 이태(李泰)가 주편한 거질 지리서(地理書)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와 고야왕(顧野王)의 《여지지(與地志)》의 양대 先代 지리서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지리서 체례를 열었다고 평가되며 여기에서 이룩한 지리서 편찬 전통은 후대의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와 《태평환우기(太平圜宇記)》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미 남송(南宋)대에 이르러 그 원전은 망실되어 버리고 그 잔편(殘篇)들만이 후대 다른 서적들에 산발적으로 인용되어 전할 뿐이다. 편찬 책임자 이태는 “好士愛文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아버지 태종 또한 그를 총애해 그에게 문학관(文學館)을 세우도록 허락했다. 이에 .. 2018. 3. 9.
《삼보황도(三輔黃圖)》 6권 원저자는 불상이며 성립 연대 또한 알 수 없으나 東漢 末 이전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三國시대 魏人인 여순如淳의 《한서주漢書注》에 이미 인용되기 때문이다. 《수서 경적지(隋書經籍志)》에서 처음으로 존재를 드러내니 이때는 一卷本 《三輔黃圖》이었다. 그 뒤 南宋 조공무晁公武의 《독서지讀書志》에서 이를 三卷으로 바꾸기 시작했으며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재直齋書錄題解》에서는 兩卷이라 했다. 《四庫全書總目》은 여수겸勵守謙이 收藏한 六卷本을 저록하면서 佳本으로 간주했다. 육권본은 漢代 三輔 지역의 古跡을 主로 삼으니 특히 長安을 가장 충실이 기술했다. 그 외에 秦漢 시대 三輔 지역의 風俗도 덧붙였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이 책을 가리켜 “이에서 기록한 궁전과 원유의 제도는 조목별로 잘 분류해서.. 2018. 3. 9.
《續資治通鑑長編속자치통감장편》980卷, 南宋 李燾(1115?~1184) 撰 전문검색은 다음으로 들어가라 http://cls.admin.yzu.edu.tw/Tong/search_main.htm 도합 980卷이며 南宋 이도(李燾, 1115~1184) 撰이다. 宋 太祖 조광윤(趙匡胤) 건륭(建隆. 960)에서 시작해 宋 欽宗 趙桓 靖康(1127年)에 이르기까지 北宋 九朝 168年 역사다. 李燾는 正史와 實錄과 政書에서 채록하고 “旁採異聞, 補實錄, 正史之闕略;參求眞是, 破巧說․僞辨之紛紜”하여 體例는 司馬光 《資治通鑒》을 모방하니 근본을 “寧失於繁, 無失於略”하는 原則에 두었으니 記載에 不同한 곳이 있으며 兩存 是說했다. 周密의 《계신잡지(癸辛雜識)》에 의거할 때 李燾는 재료 수집 시에 “作木廚十枚, 每廚作抽替匣二十枚, 每替以甲子誌之. 凡本年之事, 有所聞, 必歸此匣, 分月日先後次第之,.. 2018. 3. 9.
《태평어람(太平御覽)》 太平御覽 一千卷 宋 李昉 等 編纂 http://www.guoxue.com/wenxian/leishu/0001.htm 北宋시대 전기에 국가에서 편찬한 ‘四大書’ 중의 하나이다. 《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 이르기를 “宋李昉等奉敎撰. 以太平興國二年受詔, 至八年書成. 初名《太平類編》, 後改名爲《太平御覽》. 宋敏求《春明退朝錄》謂書成之後, 太宗日覽三卷, 一歲而讀周, 故賜是名也.”(송나라 이방 등이 교서를 받들어 편찬했다. 태평흥국 2년에 조칙을 받들어 8년에 책이 완성됐다. 처음에는 태평류편이라 했다가 나중에 개명하여 태평어람이라 했다. 송민구는 춘명퇴조록에서 이르기를 책이 완성되 다음에 태종이 날마다 3권씩 보다가 1년만에 독파했으니, 이런 인연으로 이런 이름을 내렸다)라고 했다. 전체를 50개 門으로 나누었으며, .. 2018. 3. 9.
극락(極樂) 산스크리트 原語는 “樂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住하는 世界를 가리킨다. ‘극락세계(極樂世界)’ ‘극락국토(極樂國土)’라고도 한다. 漢譯 佛典에서는 ‘수마제’(須摩題) ‘수가마제’(須呵摩提) 등이라고 음사(音寫)하며, ‘안락(安樂)’‘안양(安養)’이라고 의역되기도 한다. 수도권 도시 안양은 그 이름이 바로 이에서 유래한다. 漢語인 ‘極樂’은 중국고전에서는 매승(枚乘)의 ‘상서간오왕’(上書諫吳王‘(《文選》39) 등지에 보이는데, 그 의미는 “더 이상 없는 즐거움”이다. 또 반고(班固)의 서경부(西都賦) 등지에도 보이는데 “즐거움을 다한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는 “至極의 樂”이라는 말이 나온다. 불전에서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아미타경(阿.. 2018. 3. 9.
왕흠약(王欽若) 왕흠약(王欽若. 962~1025)은 자(字)가 정국(定國)이며 북송(北宋) 신유(新喩) 출신이다. 신유는 지금의 新餘東門王家 자리다. 18세에 《평진부론(平晉賦論)》을 지어 문명을 떨쳤고, 북송 태종(太宗) 순화(淳化) 3년(992)에 실시된 순화 진사 갑과(淳化 進士 甲科)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거쳐 재상인 동평장사(同平章事)에까지 관직이 이르렀다. 경덕(景德) 원년(1004) 거란(契丹)이 내범(來犯)하자, 당시 북송 황제 진종(眞宗)은 적을 두려워하여 왕흠약과 진요수(陳堯수) 등의 大臣들이 내놓은 계책을 받아들여 남조(南逃)로 천도하려 했으나 당시 재상(宰相) 구준(寇準. 961~1023)이 힘써 중의(衆議. 여론)를 배척하여 진종에게 단주(.. 2018.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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