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2767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서얼금고 우리나라의 서얼금고庶孼禁錮는 유별난 데가 있다.이 서얼금고의 이유를 유교 때문,혹은 태종의 명령 때문이라고 하지만,사실 서얼을 몇 대가 지나도 대물림으로 몽땅 금고해버리는 짓은어느 유교 경전에도 없는 일이고,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도 드문 일이며더우기 태종은 그 스스로 서얼 금고를 명했다기보다, 이전인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금고의 전통을 재확인한 데 불과하다.오히려 이전보다 태종의 금고는 그 정도가 완화된 측면이 있다는 점요즘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서얼 금고가 집요하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이 되었는지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교나 태종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건 일종의 책임회피이고서얼금고가 된 이유는 어떤 사회적 이유에서 계속 유지.. 2025. 9. 7. 절반도 파악 안 된 1801년 조선 인구 700만 순조실록3권, 순조 1년 12월 30일 임신 4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한성부에서 오부와 팔도의 원호와 인구를 아뢰다한성부(漢城府)에서 민수(民數)를 올렸는데, 오부(五部)와 팔도(八道)의 원호(元戶)가 모두 1백 75만 7천 9백 73호이었고, 인구는 남녀가 모두 7백 51만 3천 7백 92명이었다. 실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1801년 경 호적을 보면, 실제 인구의 절반도 호적에 안올라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7백 만 명? 그렇다면 이때 이미 인구가 필자가 보기엔 1500만 명 넘었다. *** [편집자주] ***누누이 말했다.전근대 인구통계는 믿을 수 없다고.인두세 피하려 틈만 나면 누락했다.세금이다.조선총독부가 비로소 근대적 인구센서스를 하는데 이 친구들이 할 때마다 놀랬.. 2025. 9. 6. 우리 대부분은 유학모칭자의 후예이다 조선후기사에서 유학모칭자의 풀은 아주 다양한데 19세기가 되면 이 다양한 백그라운드의 사람들이 유학모칭자의 거대한 저수지에 다 모여들었다. 원래 지배계급인 양반들이 볼 때 유학모칭자, 한산자閑散者, 놀고 먹는 이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17세기만 해도 양반의 하위그룹, 서얼층이 대부분이었다. 서얼은 홍길동처럼 내가 서얼이면 끝이 아니고, 그 위로 몇 대 조인지 모를 조상이 서얼이면 그 아래 후손들이 통채로 금고가 되는지라 향촌에서 이들이 한산자 그룹을 형성했고 정부에서 유학모칭자라고 부르면 대개 이들을 의미했다. 이들은 정부 눈치를 보다가 될 거 같으면 유학을 칭하다가도 호적이 빡세질 것 같으면 업유, 업무를 칭하기도 했는데어느 쪽이건 간에 군역을 면제받는 것은 마찬가지라 자칭타칭 양반.. 2025. 9. 6. 역시나 이번에도 부엌이 토해 낸 부산 두구동 유리 곡옥 거푸집 전북 장수발 발굴성과에 격발해 지인들 도움을 받아 부쩍 유리 거푸집 관련 자료들을 검출 중이어니와,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바는 부산 금정구 두구동 주거 유적 출토품이라, 배재훈 선생이 소개해준 것으로부산 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지역 언론 국제신문이 기획 중인 [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이야기] 중 하나라, 편에 두구동에서 나온 유리제 곡옥 거푸집이라는 제하로 소개가 되었으니, 필자는 김동윤 동삼동패총전시관 학예연구사다. (탑재 일자는 2025-02-26 18:53:38) 도판을 부산박물관 제공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현재 이 박물관에 있는 모양이라내 의심이 다시금 확인되는 것 중 하나가 이 역시 희한하게도 공방이라 할 만한 곳이 아니라 이번에도 역시 일반 주거지 부엌 쪽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거 .. 2025. 9. 6. 동학혁명은 "유학모칭자"들이 주도했다 동학혁명은 필자가 보기엔 19세기에 급증하여 많게는 인구의 절반 가까이까지 차지했을지도 모르는,"유학모칭자"들이 주도했다고 본다. 이들은 기본적인 문자 해독 등 어느 정도의 독서층이고, 사는 것도 다른 이들보다 나은 사람들, 그리고 19세기가 될 때까지 양반들의 집요한 견제를 뚫고 마침내 유학을 모칭하는 데까지 이른 장난 아닌 사람들이라, 19세기 말 정부를 뒤엎겠다고 들고 일어날 사람들은 그 규모나 성정으로 볼 때 이 사람들 아니면 할 만한 사람들이 없다. 이 안에는 당연히 농사를 자기 손으로 짓는 사람도 있었을 터이고, 유학까지 따냈으니 다음 단계로 소과 정도는 급제자도 많이 나왔을 터, 동학혁명이 아래로는 농사꾼에 위로는 진사까지도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이 모든 사람을 하나로 아울러 그 성격을 정의.. 2025. 9. 6. 동학농민혁명을 "동학혁명"으로 불러야 네이버가 제공하는 옛날 신문 등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지금의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은1980년을 거치며 1990년대 초반부터 보편화한 명칭이다. 그 이전에는 그냥 "동학혁명"이라 불렀다. 동학혁명이 필자가 보기엔 보다 학술적으로 훨씬 더 중립적인 명칭이다. 여기에 그 정체도 불분명한 "농민"을 굳이 동학혁명의 명칭 안에 집어 넣은 것은1980년대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게 그 당시 불렀다고 해도 그건 사회적으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치고, 지금은 이 명칭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 완전히 타성적으로 이 명칭을 유지하는데, 정체도 불분명한 "농민"을 이 안에 넣어놓으니까이 혁명의 역사적 의미가 정확히 구명이 안 되고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 아니겠나. 왜 1980년대를 거치며 동학혁명의 이름에 농민짜가.. 2025. 9. 6. 이전 1 ··· 317 318 319 320 321 322 323 ··· 3795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