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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대 초기의 호적을 보고 받은 충격 우리나라 삼남 지역 어느 고을의 1700년대 호적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정말 충격을 받았다. 앞에도 썼지만 가가호호 4-6명 정도 노비는 다 데리고 있었고 자작농은 거의 없어 보였다. 실제로 17세기 초반 상황을 그린 쇄미록을 보면주인인 양반집이 각지에 흩어진 노비들로 부터 신공을 거두는 모습이 보이는데 또 다른 비슷한 시기 일기에서도 유사한 정경을 묘사한 것을 보면17세기 초반은 지주 전호제가 성립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보며과연 이러한 노비 노역을 근거로 한 생산방식이 언제나 해소되는가를 궁금해 하던 필자로선우리나라 삼남지역 번듯한 동네에서 1700년대, 즉 18세기 초기까지도집집마다 4-6명 노비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 시기까지도 우리나라는 노비의 노역이 나라의 생산양식에서 막대한 부분을 .. 2025. 7. 5.
괌 동굴에서 3,500년 전 쌀 확인 신석기 공동체가 이주하면서 가져가, 주식보다는 의례용 오늘 Science Advances에 발표된 새로운 연구에서, 나와 동료들은 미크로네시아Micronesia 서부 마리아나 제도Mariana Islands에 위치한 괌Guam의 고대 동굴 유적에서 태평양 섬에서 가장 오래된 쌀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작물화한 쌀은 약 3,500년 전 필리핀에서 2,300km(1,400마일)의 외해를 항해한 최초의 섬 주민들이 운반해 왔다. 이 발견은 오랜 학문적 논쟁을 종식하고 초기 태평양 사람들의 기원과 생활 방식에 대한 수십 년간의 호기심을 해소해 줄 것이다.필리핀에서 동쪽으로 2,000km[1,240마일] 이상, 인도네시아에서 북동쪽으로 2,000km 이상 떨어진 마리아나 제도 사례는 특히 흥미롭다.이 섬들은 외딴.. 2025. 7. 5.
또 핵폭탄 던진 중국고고학, 30만년전 목제 도구 발견 운남 간탄칭 유적서 식물채집 도구 35점 무더기 보고 30만년 전 이 목제 도구들은 동아시아 호미닌들이 호숫가에서 계획적으로 채집 여행을 하며 특정 목적에 맞는 도구를 설계했음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구석기 시대 목제 도구 35개를 발견됐다. 이 도구들은 뛰어난 장인 정신과 고도의 인지 능력을 보여주며, 고대 인류가 무엇을 먹었을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한다. 7월 3일 목요일 사이언스(Science)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30만 년 된 이 도구들은 동아시아에서 기록된 가장 오래된 목제 유물다. 이 도구들에는 소나무와 hardwood로 만든 파기용 막대기digging sticks, 뿌리를 자르는 갈고리hooks for cutting roots, 땅에서 식용 식물을 캐내는 작고 뾰.. 2025. 7. 5.
김홍도 그림의 농민(?) 들 이 그림-. 김홍도의 타작도는 "농민"과 "이를 감독하는 마름"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본다. 이것이 농민과 마름의 모습일까? 필자가 보기엔 이건 주인인 양반과 양반에 귀속된 노비다. 쇄미록에 보면 노비를 들에 일시키고 감독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저 삐딱하게 누워 술 한 잔 걸치며 감독하는 이는마름으로 보기엔 석연찮다. 필자 생각엔 아무래도 주인 양반 같고 타작하는 일들은 노비가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뜻이다. 2025. 7. 5.
1700년대까지도 노비가 생산의 기초 우리나라는 별로 유별날 것 없는 동네의 조선시대 호적을 봐도 1700년대에는 소위 양반에 속할 호주의 아래에 평균 5-6명의 노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8세기 초까지도 노비 비율이 40프로는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필자가 직접 본 어느 동네의 조선시대 호적도 그랬다. 1700년대 초반, 그 동네에는 인구의 상당수가 노비였다. 이 시대가 언제인고 하니 숙종 연간이다. 숙종 임금의 시대까지도 우리나라에는 인구의 상당수가 노비였던 셈이다. 1700년대 중후반을 넘어서면서 노비의 숫자가 급감하는 것 같으니대체로 영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마을의 인구 구성은 급변한 것 같다. 같은 동네의 1800년대 초반 호적을 보면동네가 완전히 달라져 있다. 노비는 거의 유명무실해지고,1700년대까지도 몇 안 되는 .. 2025. 7. 4.
말 5,000마리를 평양에서 키운단 말인가? 남월을 강제 병합한 서한 무제武帝 유철劉徹은 내친 김에 흉노의 왼팔을 잘라버린다는 명분으로 원봉元封 2년(B.C.109), 그 병력을 그대로 위만조선으로 향햐게 하고선 그 정벌에 나섰지만 초반 정세가 호락호락하지 않아 연전연패했다. 결국 양국은 화해 제스처를 취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한 왕조에서는 위산衛山이라는 이를 부절로 삼아 강화 담판을 벌이게 한다. 다급하기는 위만조선 실권자 우거右渠 또한 마찬가지라, 적당한 수순에서 항복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공물을 바치는 선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키로 한다. 이에 위만조선에서는 사절단으로 태자를 보내 들어가 입조케 한다.이 정도에서 대치 정국을 마무리하려 했다. 한 왕조에서도 무리하게 계속 밀어부쳤다가 개망신당할 지도 모르고, 더구나 전선 사정이 좋지도 않는데다.. 2025.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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