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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가재 구워먹다 냈다는 50년전 산불, 누가 질렀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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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내가 몇살 때인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그 연대는 좁힐 몇 가지 단서가 있으니, 첫째 지금의 내 나이, 그리고 그것이 발생한 시점이 같은 행정촌이기는 하되 국민학교 입학과 더불어 옆동네 양지마을으로 이사하기 전 샛터에서 살 때라는 사실, 셋째 그때 우리 집엔 트랜지스터 라지오도 들어오기 전이었다는 것 등등이 되겠다. 

이를 근거로 좁히면 대략 반세기 전이다. 혹여나 해서 각종 키워드로 그 무렵, 그러니깐 1970년대 초반 어느 무렵 내가 기억하는 그 화재가 신문기사로 남아있을까 해서 검색해 보니 그에 해당하는 그 사건이 걸리지는 않는다. 1972년 금릉군 대항면 산불 소식이 있지만 이건 분명 아니다. 

 

 

저 섬계서원이라 표시한 지점이 내가 자란 곳이며 현재 엄마랑 동생이 사는 데다. 붉은색으로 동글한 데가 비봉산이라는 데라, 해발 650미터,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엔 저 산과 그 기슭 온산이 내나 누빈 터전이다. 내가 어린 시절엔 저 산 이름도 몰랐고(엄밀히는 없었다), 해발도 몰랐다. 그러기엔 주변을 두른 해발 천미터를 상회하는 산이 즐비하는 까닭에 고작 해발 650미터 봉우리가 무슨 이름? 

더구나 일찌감치 폐교가 되어버린 내가 나온 가례국민학교는 교가도 없었으니, 내가 다니던 그 시점 고학년 어느 무렵에 교가가 없는 학교가 어딨냐고 해서 홍륭희인가로 성함을 기억하는 교장 선생님이 비로소 교가를 지었으니, 거기에다가 "비봉산 기슭에"라는 첫 구절을 넣었으니, 그 교가를 짓고 나서 이 선생님 말씀을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데 

"저 산 이름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비봉산이라 카더라, 그래서 비봉산 기슭에 라고 했다"는 요지였다. 

 

산불이 지난 자리. 산불이 참말로 묘한 것이 야산 말고 온산을 태우는 산불은 드물다. 한쪽만 대개 태운다. 왜 그런가? 맞바람 때문이다. 맞바람을 만난 불길은 스스로 소멸한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훨씬 전이었으니, 그러니깐 대략 1972년 어간에 저 비봉산이 불로 홀라당 탔다. 저 산 기슭에는 현재는 직지자 말사 비구니 사찰인 봉곡사가 새재라는 마을 입구에 있으니, 어른들 말씀을 종합하면 6.25 이전에는, 그리고 그 훨씬 이전에는 엄청난 사세를 자랑했다 하는데, 지금은 아담 사이즈로 쪼그라들었다. 

저 비봉산 정상을 중심으로 우리 집 우리 동네까지 직선거리로 대략 몇 킬로미터는 되는데, 우리 동네를 기준으로 저 높은(물론 우리 동네에서 해발 650미터는 야산이다) 산이 정상까지 홀라당 탔다. 

산불이 났다는 소식은 시시각각으로 동네로 날아들어 웅성웅성했다. 한데 났다는 산불이 보이지는 아니했다. 동네 장정들은 산불 끄는 일에 동원됐지만, 진압장비라 해봐야 뭐가 있겠는가? 소나무 생가지 꺾어 잔불 때려잡는 거 밖에 없었고, 또 삽을 들고 올라가서는 그 잔불을 흙을 던져 엎는데 지나지 않았다. 

이건 몇 번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산불이 그리 겁나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났다는 산불은 한동안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있다. 우리 동네 기준으로 저 비봉산 뒤편에서 났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한동안 났다는 산불은 불길은 안 드러낸 채 짙은 연기만 모락모락 산 능선 뒤편에서 솟아날 뿐이었다. 

 

이번 울진삼척산불 한 장면. 내가 반세기 전에 본 산불이 딱 이랬다. 이렇게 뒷산에서 정상으로 타고 올랐다. 저기서 생긴 재가 무수히 우리 집으로도 날아들었다.

 

그러다가 그날 밤(혹은 낮인지도 모르겠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났다는 산불이 마침내 불길을 드러낸 것이다. 동네에서 쳐다보니 저 비봉산 정상이 뒤에서부터 활탈 타오르는 것이 아닌가? 와! 그 불길 장대하더라. 더구나 밤에 보는 그 불길은 요즘 같으면 아마겟돈 불신지옥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야 나는 워낙 어려서 공포감이라는 걸 몰랐지만, 그 활활 타는 불길과 더불어 그 산불 현장에서 날아든 잿더미가 우리 동네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로서는 신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했던 게 그때 우리 동네는 초가가 대부분이었고 우리 집도 초가였다. 다 타버린 재였기 망정이지 불덩이였다만 동네 홀라당 다 날아갈 뻔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나면 범인이 누구냐로 화제가 옮겨가기 마련이다. 그 범인 내가 알기로는 잡히지 않았다. 영원한 미궁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왜냐하면 잡혔다면 그 소문은 순식간에 동네에 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소문만 돌았을 뿐,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은 없었다.

 

이거 보면 산불이 확산하는 가장 큰 원인이 낙엽과 잡목임을 본다.

 

그때 가장 그럴 듯한 소문이 가재를 잡아 산속에서 구워먹다가 불을 냈다는 것이다. 그때 가재나 뱀 개구리를 잡아 구워먹는 일이 흔했으니, 이건 나도 우리도 매양 하던 일이었다. 다만 이런 일이 거개 수풀이 무성한 여름이라면 산불로 진화할 일은 거의 없다. 불이 붙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런 일로 인한 산불은 당연히 지금과 같은 초봄에 일어나는 일이 많은데 그때 발생시점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틀림없이 이맘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온산이 활활 탔지. 

불이 지난 다음 또 울 엄마를 비롯한 동네 어른들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내녕겐 고사리 마이 나겠다. 이거였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산불이 지난 곳에는 고사리가 많이 난다 했다. 

실제로 그랬다. 산불이 지난 자리에는 고사리가 무성하게 났다. 그 고사리를 따다가 살짝 데치는 식으로 말리고는 그걸 한뭉치씩 묶어 판 돈으로 소금이 절반인 고등어며 갈치를 사다 먹었으니 말이다. 

 

내가 보는 한 산불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꺼지는 것이다. 그걸 꺼지게 하는 것으로 첫째가 바람, 둘째가 연료 소진이다.

 

이후 내가 고향을 떠나고서 우리 동네 혹은 이웃 동네서 지금까지 서너번 산불이 났다. 그 산불 현장에서 그을려 죽은 고라니를 발견한 일도 있다. 

울진삼척 산불소식에 오만잡상이 다 떠오른다. 막대한 피해를 낸 불은 인문학적 지식 혹은 상식을 동원하면 그 자체 재생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심성인 듯한데, 불은 모든 것을 태우지만, 그것이 남긴 재는 다시금 새 생명을 틔우는 거름이 된다. 

불은 묵은 것을 쓸어내는 의미가 있다. 천지개벽 신화에는 언제나 불이 등장하는 까닭이다. 천지개벽은 붕괴와 전멸을 전제로 한다. 그 전멸에서 새것이 태어나니 말이다. 그래서 불은 언제나 새로운 탄생이다. 

그렇다고 이번 불을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엔 피해가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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