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요나라 역사 통사로 원나라에서 관찬한 요사遼史는 전체 108권이라, 개중 열전은 권63부터라, 딱 절반이 열전이다.
그 열전 마지막이자 요사 전체의 마지막인 권108 열전 제46은 거란어에 대한 해설인 국어해國語解이고, 그 바로 앞이 이국외기二國外記라,
이는 여타 사서에서는 외국열전을 세운 데 견준 것과 대비하는데, 요사가 말하는 이국二國이란 바로 고려高麗와 서하西夏라, 이는 그만큼 거란 역사에서 두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강한 까닭이다.
이 두 왕조가 거란을 다룬 양상을 보면 아주 비슷해서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실로 절묘하게 갖고 놀았다는 표현이 딱 적당하다.
이 이국열전에는 고려의 경우 그런 양상이 잘 드러나지 않고 주로 두 왕조 사이에 있는 전쟁과 평화 시대 이야기를 추렸지만, 이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혹은 대각국사문집 같은 고려 측 기록을 보면, 고려가 얼마나 당시 국제정세에 따라 거란을 가지고 놀았는지가 적나라하다.
당시 중국 대륙을 보면 북쪽 거란을 맹주로 삼아 이른바 조공책봉 체제가 구축되었으니, 송나라 또한 거란에 신속했으니, 그 주변에 위치한 대표 왕조가 서하와 더불어 고려였다.
고려는 두 왕조 사이를 가지고 놀았다. 거란이 강자로 부상하면서 공식 조공은 거란을 선택했지만, 송과의 관계도 결코 포기하지 않아 종래의 신속 관계를 드러내놓고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양쪽에서 빼먹을 수 있는 건 다 빼먹었다.
이 꼬라지가 하도 더럽게 보여서 그 유명한 동파 소식은 고려와는 아예 국교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논설을 연이어 발표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고려는 초반에는 거란과는 전면전도 불사했다. 치고 받고 싸우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타격을 보기는 했지만, 결국 이겼다고 할 만하다.
이 승리를 발판으로 거란에 시종 신속하면서도 얻을 건 다 얻었으니, 방패막이로 거란을 내세운 것이다. 이 관계는 거란이 사라지면서 곧바로 여진으로 가게 된다.
이와는 달리 이 이국열전이 그리는 서하는 시종일관 쥐새끼 같은 존재로 묘사한다.
서하는 고려와는 달리 양쪽에서 거함들과 충돌했다. 하나가 거란이요 다른 하나가 송이라, 이 둘과 시종 길항관계가 복잡다기하기만 했다.
그 군주 성향에 따라 이른바 매파가 들어섰을 때는 거란과도 치고 받았다. 거란 서쪽 국경을 걸핏하면 침범하고, 그러면서도 송과도 그런 관계에 있을 수는 없으니, 그럴 때는 송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송과 치고 받을 때는 아주 안면 쏵 바꾸고 시종 거란에 알랑방구 끼면서 송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공책봉? 이딴 걸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결국 실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가 먹을 것이 없으면 주인을 향해서도 개는 물기 마련이라, 고려와 서하가 거란에 대해 그랬다.
쳐들어온다?
드루와! 받아주께.
그러다 때론 개피 보기도 했지만, 고려는 결코 외적에 무너질 수가 없었다. 왜? 거란은 결코 일시적인 점령지를 장기 점령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고려의 반격이 거셌고, 이들은 기본이 청야를 근간에 까는 옹성전이라, 이런 고려를 거란은 버텨낼 재간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것을 받침할 현지 조달 체계를 갖출 수가 없었다.
목축과 잡곡을 기반으로 삼는 거란이 험준한 산에 기댄 농경을 기반으로 삼는 고려를 뿌리째 뽑을 수는 없었다.
이걸 뒤집어 엎은 유일한 예외가 제국주의 일본이다. 낙랑? 이건 좀 다른 문제로 나는 보니 예외로 친다.
이 점에서 일본의 점령은 대서특필해야 한다.
왜 일본은 그게 비록 35년간이라 하지만 가능했을까?
이 점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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