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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고려시대 안태安胎 전통[1] 태조 왕건의 태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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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태실은 왜 중요한가?

한반도 태실 문화 전통을 논할 때 통일신라시대를 포함해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삼국시대 사례는 충북 진천 태령산의 김유신 태실이다. 

이 태실은 이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그런 사실을 대서특필했다는 점에서 삼국시대에 안태安胎 장태藏胎 문화와 관련해 역시 대서특필해야 한다.


진천 김유신 태실



다만 통일신라 이전 태실 문화를 엿볼 만한 자료로는 거의 유일한 데다가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도 아니어서 여러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하나 이 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김유신 태실 그 자체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그러한 사실을 김부식이 대서특필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김부식 시대에는 태실 문화가 확실히 인지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더불어 실물자료로써 현재까지 가장 확실한 태실은 놀랍게도 김유신보다 훨씬 시대가 떨어지고 나아가 고려시대 500년을 뛰어넘어 조선시대 들어와 그 개국주 이성계에 와서야 가능하다는 점 또한 대서특필해야 한다.

이 이성계 태항아리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따라서 직간접 자료에 의하건대 한반도 태실 문화는 김유신 시대에 느닷없이 출현했다가 고려 왕조 500년을 건너뛰어 조선시대에 느닷없이 이성계 이래 갑자기 융성 흥성했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는다.

이 한반도 장태 문화를 논할 때 왜 고려시대가 중요한가?

조선시대에 그것이 흥성한 밑거름이 고려시대이며, 나아가 그 이전 시대, 곧 김유신 시대 태실이 돌발이 아님을 직간접으로 받침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 고려시대 안태 문화를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적어도 김유신 시대를 기점으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장구한 안태문화를 잇는 미싱링크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장태 문화는 어땠는가?


2. 신라인 왕건과 고려인 이성계 

나는 항용 이 두 사람을 논할 때 우리가 망각하지 않아야 할 점 중 하나로 저를 지적하거니와, 왕건은 신라가 배태한 신라인으로 그에서 어린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낸 이후에 고려를 건국했으며,

이성계는 전 왕조 소속이라는 점에서 왕건보다 사정이 더해서 그는 송장이 되기 직전까지 고려시대를 살다가 뒤늦게 신왕조를 개창했다.



이성계 태항아리



안태 문화라는 측면에서도 이 문제는 심각히 중요한데, 곧 저 두 사람이 안태를 했다면, 그 전통은 새로운 왕조의 전통이 아니라 그 전시대가 배태한 전통이라는 사실이다. 

이성계는 확실히 태실을 만들었으니, 고려시대에 저와 같은 안태 전통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곧 그의 태실은 느닷없이 어느날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에서 왕건 역시 중요하다.

왕건은 태실을 만들었는가?

놀랍게도 왕건 역시 태실을 조성했다.

물론 이 태실은 그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대대적으로 그 규격에 맞게 손질한 것이지만, 이미 그가 태어날 때, 다시 말해 그가 태어난 그 신라시대에 안태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개성부상開城府上 산천山川 대흥동大興洞 조에 이르기를 

또 (이 대흥동에는) 해인海印·취운聚雲·법림法林·태안泰安·마곡雲谷 등의 옛 터가 있다. 태안泰安은 곧 고려高麗 태조太祖 태실胎室이다. 

고 했으니, 이것이 고려왕조가 이미 왕건 시대에 왕의 태실을 조성했다는 우뚝한 증거다. 

이 역시 어느날 하늘에서 떨어질 수도 없으니, 그 전통은 신라시대에 말미암았음은 한밤중 모닥불을 보는 것 만큼이나 분명하다. 

간단히 말해 신라시대에도 분명히 안태 문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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