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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귀주대첩] (15) 왕 노릇 11년 만에 왕이 된 고려 현종 왕순

by taeshik.kim 202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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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교 정상화라는 개념이 전근대랑 현재는 조금 다르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는 상대국에 상시로 주재하는 전문 외교관이 있느냐 없느냐다.

한국사의 경우 상시 외교관 주재 제도 자체는 구한말에 가서야 가능했다. 그 이전에는 종주국이라 삼는 중국 역대 왕조에 이런 제도 자체가 있을 수도 없었으니, 때마다 사신을 왕래하는 일이 공식 외교관계의 형식이었다.

이를 흔히 조공 책봉 관계라는 말로 치환하고는 하지만, 일본 동양사학에서 유래한 이 개념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층위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3차 고려거란전쟁을 계기로 고려와 거란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다는 말을 앞서 했거니와, 전쟁 중에도 두 왕조는 꾸준히 사신을 왕래했다. 다만 하도 치고받는 바람에 그 관계가 길항이 있었을 뿐이다.

이 전쟁이 끝난 다음 공식 외교 관계는 현종 13년 4월에 회복하게 된다. 이때 거란은 어사대부御史大夫 소회례蕭懷禮를 보내서 현종 왕순王詢을 개부의동삼사 수상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10,000호 식실봉 1,000호 [開府儀同三司 守尙書令 上柱國 高麗國王 食邑一萬戶 食實封一千戶]로 책봉하게 된다. 아울러 그에 어울리는 수레·의복·의물儀物을 하사한다.

이 봉작 실은 암짝에도 내실은 없다. 이미 고려는 독립 왕국이라 무슨 그런 왕한테 식읍을 봉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는 실질보다는 상징이다. 이는 왕순이 정식 고려왕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며, 이는 이제 두 왕조 관계가 전쟁이 아닌 평화로 들어섰음을 말하는 것이다. 

현종은 즉위한지 11년이 지난 뒤에야 거란에서 공식 왕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렇게 되니 이제 고려는 다시 거란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훗날 100년 뒤 여진 금나라 연호를 사용하기까지 이제 고려는 적어도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거란의 시간에 구속되는 시대로 접어든다. 

연호란 그런 것이다. 그만큼 상징이 큰 표식이다. 

한데 우리가 기억할 점은 고려가 거란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 이전을 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국 초기에는 자체 연호를 쓴 고려는 933년 3월에는 후당에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왕건이 그 책봉을 받는 형식을 빌려 후당 연호를 쓰다가 938년 7월에는 후당이 후진으로 교체되자 그 연호를 썼다.

하지만 그조차 948년에는 후한 연호로 바꿨으니, 그러다가 951년 12월에는 후주 연호를 쓴다.

이 당시는 이미 거란이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자리를 잡았는데도 고려는 거란은 안중에도 없이, 거란이 맘대로 조종하는 한족 왕조들을 주인으로 섬기는 모양새를 줄곧 취했다. 

이런 일들을 얼마나 거란을 자극했겠는가? 거란 관점에서 보면 고려 이 놈들은 씹어먹어도 시원찮았다. 쥐뿔도 없는 놈들이 대들기만 하니 기분 좋겠는가? 

거기다 고려는 963년 12월에는 송나라 연호를 쓴다. 어쭈? 거란이 어찌 열받지 않겠는가?

고려거란전쟁을 일으킨 동인은 거란 관점에서 보면 고려에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려가 거란 연호를 쓰는데, 그것이 널리 알려졌듯이 세 치 혀 서희의 담판술이었다.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지어 그래 니들 가오 우리가 세워주겠다.

우리가 이제 너들한테 신속하고, 꼬박꼬박 방물도 바치고 외신外臣이 될 테니, 니들도 우리한테 뭘 주야댈끼 아이가? 땅 좀 주레이, 압록강 동쪽 거긴 어파피 니들도 골치 아픈 여진 놈들 땅 아이가? 거기 우리가 접수할낑께 너들은 가만 있어주마 댄데이 콜? 

그렇게 해서 고려는 이듬해 994년 2월 거란 연호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두 나라 관계는 이른바 2차 고려거란전쟁이 발발하고, 그에 거란 황제 야율륭서가 친정하면서 파탄난다.

이 전쟁에 야마가 돈 고려는 어랏 씨불 니들 일케 나오제? 그라마 우리 오야붕 바꾼데이? 하고는 현종 시대인 1016년 다시 송나라 연호로 갈아탄다. 

왜 거란이 줄기차게 이른바 강동6주를 돌려달라 하고, 현종이 직접 거란 땅으로 들어와 거란 황제를 배알하라 했겠는가?

물론 이 둘은 얼키설키 선후가 뒤죽박죽이기는 하지만, 이런 관계는 결국 1018년 전면전으로 다시 치닫는 직접 원인이 된다. 

그 전쟁에서 거란을 묵사발낸 고려는 이제는 아주 다른 처지에서 편안하게 오야붕을 바꾼다.

그래 우리가 이겼으니, 이젠 너희들 소원도 들어주께. 콜, 니들 연호 쓸 테니, 니들도 이젠 우리 왕 좀 제발 대외로 인정해주레이. 콜? 

이런 기나긴 외교 투쟁에서 저와 같은 외교 관계 회복이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허여한 시간을 누가 장악하느냐는 한반도 북쪽 정권이 주장하듯이 자주? 독립? 이딴 거랑은 하등 연관이 없고, 오직 내가 먹을 게 얼마인가? 그에 달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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