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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김미량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by 김별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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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루한 것들을 지운 게 ‘스토리(소설)’이고, 모든 설명을 지운 게 ‘시’랍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설명충’이라 시는 쓰지 못하고 결국 소설가가 되었습지요.(지루한 거 질색인데 정작 소설은 엄근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좋아해요. 묘사에서 막히고 감정 표현이 삭막해질 때 무작정 시를 읽기도 했죠. 시는 짧아서 빨리 읽을 수 있어요.

그런데 짧지만 빨리 읽고 덮을 수 없는 시도 있어요.

일주일 전쯤에 받았는데 단번에 읽고 덮지 못해 말라빠진 바게트 뜯어먹듯 조금씩 읽고 있는 시집, 대전에서 태어나 속초에서 사는 김미량  시인이 펴낸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달아실)가 그런 것입니다.

좋은데 왜 좋은지 설명하고 싶지 않군요. 저보다 고작 한 살이 어릴 뿐인데, 그녀의 시는 십대와 이십대 문학이라는 열병을 앓던 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의 이름, 그녀가 스스로 규정한 이름처럼 치명적이지만 죽음에 이르지 못할 만큼 ‘미량’의 독성을 가진 계절과 시와 꽃의 기억.

강원문화재단 첫걸음 사업에 선정되어 등단 14년 만에 시집을 내게 되었다면서 미량, 그녀는 페메로 “다음 시집은 더 잘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요.

불만스럽게, 게걸스럽게, 잘 쓸 때까지 계속 계속---오랫동안 제가 스스로 했던 다짐으로 응원을 대신했습니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이즈음 곱씹고 있는 구절들을 아주 ‘미량’만 나눠보겠습니다.

열두 살에 신의 무릎에 앉아 본 기억으로 지상에 꽃🌺을 알리러 온, 김미량 시인의 건필을 빕니다.
  
****

그때 당신은 나를 지웠을까
웃음은 흰 개처럼 네 다리가 달렸구나
어떤 슬픔은 컹컹 나를 울렸지만(<도망가자는 말을 들었다> 중에서)

어디서나 잘 들키고
한없이 속상하라고
반짝이는 이마를 가졌답니다(<새를 묻고 꽃을 꺾었습니다> 중에서)

반으로 나누던 빵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뒹구는 당신의 심장
깜박 빵과 함께 나동그라진 하오의 약속(<흘림과 홀림 사이> 중에서)

무덤은 칼집을 낸 밤 같아서
생각만으로 군불 속에서 익고

팡, 터지는 무덤에서 퉁겨져
잘 익었는지 내 흉터를 보겠다던 사람(<시월> 중에서)

꽃은 세상에 오기 전
작은 색종이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저녁이면 신과 함께
형형색색 꽃을 접었다
말없이 동그란 탁자에 마주 앉아
보라색을 좋아하는 나를
맨 처음 제비꽃으로 접어주셨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신의 무릎에 앉을 수 있었다
(당신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떠나오던 날
신은 분홍색 분꽃을 접어 손바닥에 올려주셨다

어른이 되어
누군가의 손바닥에 분꽃을 올려놓으면
그 사람은 겨울에 죽는단다

신의 부탁으로
사람들에게 꽃을 알리러 세상에 왔다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중에서)


**** Editor's Note ****


저명 소설가로 지금은 강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무보수 재직 중인 김별아 선생 소개라

몇 구절 인용한 시구가 하도 특이해서 업어온다.

한국시에선 쉽사리 보기 힘든 발상을 구사한다.

별아 선생 시와 스토리 규정 역시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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