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지도 논란은 실은 낙랑군 위치 논쟁이다.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소위 재야의 거센 반발에 저 지도는 개판이 되었다. 역비에서 이번 사태를 공박하며 재야를 비판하는 젊은 고대사학도들 비판이 실렸다 한다. 그걸 일부 언론이 요약 보도하면서 다시 입방아에 오른다.
낙랑 재평양설을 주장하는 역사학을 식민사학이라 규정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보다 더 강력한 고고학적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가장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이에 토대한 주장을 식민사학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더불어 그 반대를 주장한다 해서 재야사학이라 몰아부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이른바 주류강단사학은 게임 끝났다고 하면서 툭하면 낙랑토성에 전축분에다가 근자 공개된 낙랑 호적 목판을 동원하지만 이것이 저 논쟁을 이론의 여지없이 만든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늘 말했듯이 이 논쟁이 정말로 끝나려면 두가지를 해결해야 한다.
1. 위만조선 흔적을 찾아야 한다.
2. 미천왕에 의한 낙랑 정벌 이후 낙랑을 해명해야 한다.
첫째와 관련해 평양 일대엔 도무지 위만 흔적이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둘째와 관련해 이른바 낙랑 교치설이라 해서 저 큰 군이 어느날 느닷없이 속현을 모조리 데리고 벵기 타고 날라서 평양에 있다가 요서로 갔다 한다. 하지만 이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를 해명하지 못하는 한 낙랑 논쟁은 죽었다 깨어나도 제걸음이다.
(2016.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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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를 이른바 교치僑治에 기반하는 주장이어니와 교치란 간단히 말해 교포가 탄생하는 원리와 같아 예컨대 서울 살던 한국사람이 미국으로 가서 '교포'가 되고, 나아가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차츰 모여서 그쪽에 별도 공동체를 형성하고는 그짝에다가 그 한인촌을 서울이라 부르고, 그 서울을 다시 종로 중구 서대문 서초 등등과 같은 구역으로 농군다는 발상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 특히 북쪽에 기반을 두다가 장강 남쪽으로 몰려내려가면서 몇 군데 본래 떠난 곳 지명을 데불꼬 가서 다른 곳에다가 그 지명을 박아버리는 일이 발견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밀려난 낙랑 역시 요서 지역으로 밀려나면서 그리했다는 증거가 그 어디에도 없다.
아무튼 저 두 가지가 해명되지 않은 이 논쟁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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