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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낙랑군 만주설을 주장한다고 재야는 아니다

by taeshik.kim 2021.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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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지도 논란은 실은 낙랑군 위치 논쟁이다.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소위 재야의 거센 반발에 저 지도는 개판이 되었다. 역비에서 이번 사태를 공박하며 재야를 비판하는 젊은 고대사학도들 비판이 실렸다 한다. 그걸 일부 언론이 요약 보도하면서 다시 입방아에 오른다.


낙랑 재평양설을 주장하는 역사학을 식민사학이라 규정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보다 더 강력한 고고학적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가장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이에 토대한 주장을 식민사학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기원전 45년 낙랑군 지역별 가구수와 인구수, 전년대비 가구수 증감률을 적은 목판. 이에 의하면 당시 낙랑군 가구는 4만3천845호, 인구는 28만4천261명이다. 산하 25개 현縣 중에서는 조선朝鮮이 가장 많은 5만6천890명(9천678가구)이고 제해提奚현은 1천303명(173가구)으로 가장 적다. 목판 3장 전체 글자수는 716자이며 3장 길이를 합치면 23㎝정도가 된다. 이른바 재야 공격에 시달리던 이른바 강단사학계에서는 이 자료 출현을 가뭄끝 단비처럼 반기면서 적어도 낙랑군 위치논쟁은 끝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에 더불어 그 반대를 주장한다 해서 재야사학이라 몰아부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이른바 주류강단사학은 게임 끝났다고 하면서 툭하면 낙랑토성에 전축분에다가 근자 공개된 낙랑 호적 목판을 동원하지만 이것이 저 논쟁을 이론의 여지없이 만든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늘 말했듯이 이 논쟁이 정말로 끝나려면 두가지를 해결해야 한다.


1. 위만조선 흔적을 찾아야 한다.
2. 미천왕에 의한 낙랑 정벌 이후 낙랑을 해명해야 한다.


첫째와 관련해 평양 일대엔 도무지 위만 흔적이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둘째와 관련해 이른바 낙랑 교치설이라 해서 저 큰 군이 어느날 느닷없이 속현을 모조리 데리고 벵기 타고 날라서 평양에 있다가 요서로 갔다 한다. 하지만 이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를 해명하지 못하는 한 낙랑 논쟁은 죽었다 깨어나도 제걸음이다.

 

(2016. 3. 5) 

 

***

 

두번째를 이른바 교치僑治에 기반하는 주장이어니와 교치란 간단히 말해 교포가 탄생하는 원리와 같아 예컨대 서울 살던 한국사람이 미국으로 가서 '교포'가 되고, 나아가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차츰 모여서 그쪽에 별도 공동체를 형성하고는 그짝에다가 그 한인촌을 서울이라 부르고, 그 서울을 다시 종로 중구 서대문 서초 등등과 같은 구역으로 농군다는 발상이다. 

 

이른바 낙랑 논어죽간. 대나무를 판판하게 깎고 말려 거기다가 붓글씨로 논어를 적어내려갔다. 왜? 당시 종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게 싸게 먹히기 때문이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특히 북쪽에 기반을 두다가 장강 남쪽으로 몰려내려가면서 몇 군데 본래 떠난 곳 지명을 데불꼬 가서 다른 곳에다가 그 지명을 박아버리는 일이 발견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밀려난 낙랑 역시 요서 지역으로 밀려나면서 그리했다는 증거가 그 어디에도 없다. 

 

아무튼 저 두 가지가 해명되지 않은 이 논쟁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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