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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남의 비문에다 자기 울분을 토로한 최치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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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신라 헌강왕 11, 885)에 이르러, 나라 백성 중에 유도儒道를 중매쟁이로 삼아 황제 나라로 시집가 이름을 계륜桂輪에 높이 걸고 관직이 주하사柱下史에 오른 이가 있어 이름을 최치원崔致遠이라 하니, 唐 황제(희종·僖宗-인용자)의 조서詔書를 두 손에 받들었는가 하면, 회왕淮王(고변·高騈-인용자)이 준 의단衣段을 함께 가져 오니, 비록 이 영광 봉황이 날아다닌 일엔 부끄러우나, 학이 돌아온 일엔 자못 비길 만 하리라."


문경 봉암사. 출처 문경시.



최치원은 지금의 경북 문경 봉암사에 남은 대당 신라 고 봉암산사교휘 지증대사 적조지탑 비명 병서 大唐新羅國故鳳巖山寺敎諡智證大幷序 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마디로 나는 당나라 대국에서 가서 출세했다 이거다. 이런 그의 신라 귀환을 그 자신은 금의환향으로 보았다. 비록 그의 귀국이 봉황이 돌아온 일에는 견줄 수 없겠지만 학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를 막상 신라에서는 어떻게 대접했던가?


봉암사 지증대사비



충남 보령군 미산면 성주사지聖住寺址에 소재하는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郞慧和尙白月葆光塔碑 에 남은 최치원 자신이 쓴 말이다.


"다시 생각건대 서쪽에서 배우기[西學]는 대사나 내가 마찬가지임에도 스승이 되어 부리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아래서 일꾼이 되어 부림을 당하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어찌하여 심학자心學者는 높은 데서 자리하고 구학자口學者는 그 아래서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낭혜대사나 나는 같이 유학했는데도, 왜 마음으로 배우는 대사 같은 이는 남들 위에 군림하며, 더구나 그러면서도 남들한테 존경을 한 몸에 받는데도, 그에 견주어 야부리로 살아야 하는 나는 왜 이리 그런 심학자들에게서 고통을 받으면서 부림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울부짓는다.


어느날 신라왕이 불러 어전에 들어갔더니, 왕은 최치원에게 두툼한 두루마리 한 장을 던진다. 보니 낭혜화상 문도들이 작성한 대사의 행장이었다. 왕이 말한다.


"넌 야부리가 뛰어나니, 그 뛰어난 야부리로 대사의 행적을 아름답게 정리한 탑비문을 지으라!"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요, 밑져봤자 본전. 잘못 쓰면 욕 바가지로 먹고 자칫하면 목이 달아난다. 일단 거절한다.


"신은 문장이 보잘 것 없사옵고, 몸도 안좋으니 다른 사람한테 맡기시지요."


성주사 낭혜화상비



임금이 다시금 다그친다. 아래 문장 역시 같은 비문에 나오는 말이다.


"사양을 좋아함은 대체로 우리나라 풍습이라 좋기는 하나, 진실로 이 일(비명 찬술-인용자)을 해 낼 수 없다면 황금방黃金牓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그대는 힘쓸지어다!"


대사 행적 하나 정리 못하면, 네가 당나라에서 아무리 필명을 날리고 거기서 과거 급제를 했다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띵!


단디 얻어맞은 최치원은 속으로 씨부렁거리며 궁궐 문을 나선다.


성주사 낭혜화상비



"대체 어떤 샹놈들이 이 일을 나한테 떠맡겼단 말인가? 대체 누구야? 왕한데 이 일을 내가 해야 한다고 꼰지른 놈이?"


저들 비문이 놀라운 점은 최치원이 거기에다가 자기 울분과 분노를 고스란히 쏟아낸다는 사실이다.


사산비명, 그것은 결코 저들 비문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최치원이 쏟아낸 파토스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의 텍스트로 환원해야 한다. 내 보기엔 이 작업이 없었다.

(TO BE CONTINUED) 


(이상은 December 18, 2017 · Seoul 글이다)  


** 이상은 김태식金台植 <심학자心學者와 구학자口學者 사이, ‘황금방黃金牓’ 최치원의 딜레마>, 《신라사학보》 제10호, 신라사학회, 2007에 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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