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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다호리 통나무 목관 쓸 적에 구산동에서는 350톤 돌무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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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350t 고인돌 청동기 시대 묘역으로 확인…제단 논란 종지부
김동민  / 2021-07-30 15:21:15
고인돌 하부 목관묘와 토기로 묘역으로 판단…자문위원 "이견 없어"

 

 

김해 350t 고인돌 청동기 시대 묘역으로 확인…제단 논란 종지부

(김해=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 경남 김해시는 구산동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제280호)가 청동기 시대 묘역으로 최종 확인됐다고 30일 밝혔다.지석묘는 우리에게 고인돌로 익숙하며 청동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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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구산동 고인돌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기념하기 위한 고임한 돌인가? 아니면, 그렇게 고임한 돌로써 시체를 묻은 곳인가를 두고 논란이 분분했거니와, 이곳이 관심 대상이 특히 되는 까닭은 그 덩치 때문이었다. 

우선 그 통돌이 열라 무거바서 대략 350톤 내지 400톤으로 추정하고, 무엇보다 그 주변으로 길이 85m 이상, 너비 19m에 걸쳐 깬돌을 깔아 무슨 구역을 표시했다는 사실에서 그 기능이 대체 무엇이냐가 관심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이걸 이번에 기어이 파제껴서 밑을 본 모양인데, 결과는?

고인돌묘라는 것이다! 

 

 

내가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고인돌과 고인돌묘는 다르다. 고인돌은 거석 기념물 일반을 말하는 것이요, 그런 거석 기념물 중에서도 무덤으로 쓴 것만을 고인돌묘라고 하니, 모든 고인돌묘는 고인돌이지만, 반대로 모든 고인돌이 꼭 고인돌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한자어 대응 지석묘支石墓는 고인돌이 아니라 고인돌묘를 가르킨다. 왜인가? 모든 고인돌이 반드시 무덤은 아닌 까닭이다. 

암튼 김해시가 삼강문화재연구원이라는 기관에다가 의뢰해서 이 고인돌을 파제껴 보니, 그 아래서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와 더불어 토기가 나왔는데 그것이 대략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2~1세기에 통용하는 것이라 한다. 이로써 본다면, 이 고인돌은 고인돌묘(지석묘)가 확실하고, 덧붙여 그것을 만든 시기는 기원전 2~1세기 무렵이 될 수밖에 없다. 

한데 문제는 이에서 돌발한다. 

 

 

한반도 청동기시대 지표 중 하나로 꼽히는 고인돌묘는 현재까지 학계 통설? 로 볼 적에 기원전 4세기 무렵이면 종적을 감춘다고 알려졌거니와, 이번 발굴성과는 그것을 배신하고 그것이 만들어시긴 시기가 그보다 훨씬 더 내려오는 셈이 된다. 

물론 근자 이에 대한 이견도 없지는 않아, 주로 국립박물관에 일하는 친구들을 중심으로 점토대토기를 근거로 삼아 그것이 소멸하는 시기는 기원전 2세기 무렵까지 내려온다는 새로운 주장도 등장했으니, 이번 발굴성과는 이런 새로운 학설 혹은 주장이 타당함을 입증하는 셈이라 하겠다. 

동신대 이정호 선생은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간혹 전남지역 고인돌 하부에서 기원전후 무렵 토기들이 보입니다. 주로 묘실 안에서도 출토되기도 하는데, 부스러진 파편이라 고인돌 놓을 당시 것인지 논란도 있습니다. 그 시기 고인돌로는 가장 확실한 자료같습니다.

이것이 논란의 핵심을 간추린다. 

이로써 본다면, 이번 구산동 고인돌묘는 현재까지 확실히 드러난 가장 늦은 시기 고인돌묘가 되겠다. 이에 맞춘다면 그 소멸시기는 기원전 1세기 무렵이다. 물론 이건 현재까지 우리가 확인한 가장 늦은 시기라, 그 최종 소멸시기는 더 늦어져야 정상이다. 

 

 

왜? 이 세상 그 어떤 고고학 유적도 내가 가장 먼저다. 내가 가장 나중이다는 명패 달고 출현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드러난 가장 늦은 시기가 곧 해당 유적의 소멸시기를 증좌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저리 되면 또 하나 골치 아픈 문제가 등장하거니와, 저 김해 문화권만 해도, 저 고인돌묘가 축조된 그 시기가 곧바로 김수로에 의한 가락국 등장 시점과 거의 맞물린다는 점이다. 금관가야는 서기 42년 건국이며, 그 전인 기원전 57년 신라가 들어섰다. 따라서 거대한 고인돌묘가 축조되던 그 시점에 신라니 금관가야며 백제며 하는 고대국가가 출현한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막연히 논의한 고인돌묘 축조전통이 고대국가 출현과 직접 계승함을 말해준다. 물론 고대국가 성립을 고고학이나 역사학에서는 그보다 더 늦은 시기로 잡는 것이 통설이나, 이는 개소리다. 

또 하나, 같은 김해만 해도 구산동에서 저리 큰 고인돌묘가 축조된 그 시점, 다호리에서는 거대한 통나무 목관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쪽에서는 고래의 고인돌묘를 거대하게 쓰고, 다른 쪽에서는 통나무 목관이라는 새로운 전통의 묘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어케 봐야 하는가?

 

 

 

이 통나무 목관묘는 내 주장에 의하면 장강 유역 이른바 초문화권과 관련이 매우 깊다. 

문제는 이 구산동 묘역은 그 규모가 거대하다. 후대에 견주면 경주 대릉원에 비견한다. 이걸 뭐 고고학에서 말하는 강제동원체계가 어떻고 저떻고 나는 이런 논의 경멸한다. 그것이 고대국가 성립지표이니 하는 따위 나는 경멸한다. 애들 장난 수준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고민들을 안겨주는 발굴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번 발굴성과를 김해시는 오늘 아래와 같이 정리해 배포했으니, 음미 바란다. 

 

구산동 지석묘 묘역 갖춘 초대형 고인돌 확인 “청동기시대 제단 아니냐” 학계 논란 종지부

김해시는 세계 최대 규모 고인돌로 알려진 구산동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제280호)의 14년 만의 추가 발굴조사로 매장주체(목관묘)를 확인했다고 30일 밝혔다.

 또 목관묘와 함께 출토된 유물에 비춰 제작 시기는 기원전 2~1세기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지석묘 형성 시기는 기원전 8~2세기로 알려져 있다. 

 

목관 흔적 



이로써 그간 학계에서 일었던 청동기시대 제단인지, 묘역을 갖춘 초대형 지석묘인지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 묘역을 갖춘 세계 최대 지석묘라는 상징성과 함께 가장 늦은 단계의 지석묘라는 역사적 가치를 입증했다. 

구산동 지석묘는 2007년 구산지구 도시개발사업 부지에 포함돼 발굴조사가 실시됐으며 지석묘 상석은 길이 10m, 너비 4.5m, 높이 3.5m, 무게 350~400t 규모로 주위에 길이 85m 이상, 너비 19m의 할석(깬 돌)을 깐 기단묘(基壇墓)이다. 2007년 발굴 당시 지금의 자리에 보존 조치하는 것으로 결정돼 지하 5m 아래로 묻혔다. 

시는 지난 2018년부터 지하에 보존된 지석묘를 노출하고 원형을 복원해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알리고 역사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유적공원 조성을 추진하는 한편 역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국가 사적지 지정을 추진 중이다. 구산동 지석묘 정비사업은 2020년 12월부터 시작돼 올 3월 시굴조사를 거쳐 5월 발굴조사에 착수해 이달 완료됐으며 매장주체부에서 목관 1기와 함께 옹형토기 1점, 두형토기 1점이 출토됐다. 
  
 최근 발굴 결과를 참관한 허성곤 김해시장은 “2천년 전 가야의 태동과 연결되는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로 전문가 자문을 받아 복원정비계획을 수립해 김해의 역사와 문화를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유적공원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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