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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

대동보는 어떻게 팽창하는가: 어느 집안의 경우 (1)

by 신동훈 識 2026.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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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대동보는 어떻게 팽창하는가.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원래 조선전-중기까지의 족보는 

족보를 만드는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친가는 물론 처가 외가의 모든 유력자의 계보를 망라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조선전기의 지배층은 서로 혼맥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보니 

조선시대 족보의 가장 이른 시기의 족보인 안동권씨, 문화유씨의 경우 당시 지배층의 대부분을 수용하게 되었다는 말도 하였다. 

이러한 족보의 정황에 변화가 발생한것은 

별다른 노력없이도 파악이 가능한 이러한 형태의 족보가 

유교적 종법에 대한 강조에 따라 

친가 부계 위주의 대동보로 변화를 시작하게 된것이 임란을 전후해서 부터이다. 

이 시기가 되면 이미 서로간에 연락이 안되는 친족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부계 위주의 대동보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초기 대동보는 지금 알려진 대동보와는 다른 형태의, 훨씬 축소된 형태로 시작하여 

여기에 누락된 이들이 집단적으로 대동보에 가세하는 형태로 완성된 것이다. 

어떤 집안의 예를 들어보자. 

이 집안은 17세기 초반, 첫 족보가 만들어 졌을 당시부터 

부계 위주의 대동보를 지향하여 만들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고려 말 문과 급제자인 분의 아들 두분, 

그리고 그 손자 일곱분, 

증손자 열 한 분의 후손 계보만 실려 있었다. 

이 계보의 후손들이 이 집안의 종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원래의 관향에 고려 말까지도 계속 거주하며 관직자를 배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중의 당시 종손에 가장 가까운 집단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계보를 만들때 부터 이미 지방 어느곳에서 번창한 지손이 파악된 바,, 

이 지손의 조상은 고려사에도 나오는 실존 인물로

당시 이미 사족의 후손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스스로도 같은 조상으로 부터 갈려나왔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이 지손이 도대체 어디서 갈려나왔는지 알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세거지도 이 시점이 되면 너무 멀고, 

아마도 고려시대 언젠가는 갈려 나갔을 것 같은데 도대체 그 시점을 알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이 집안은 어떻게 해결했는가. 

앞에서 말한 계보가 파악되는 혈연집단 증손자 열한 분의 집안 계보는 그대로 유지하되, 

계보가 갈려 나간 시점을 알 수 없는 이 지손은 따로 별보를 꾸려 족보의 뒤에 두고, 

이렇게 편제한 이유를 족보에 써둔것이 17세기 초반의 일이 되겠다. 

우리는 대동보-족보를 이 은행나무처럼 한 뿌리에서 갈려 나온 가지로 인식한다. 하지만 실제로 대동보의 성립과정을 보면 그렇게 간단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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