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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땅딸보 조조曹操

by taeshik.kim 2020.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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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묘

 

중국 남조시대 송宋나라 임천왕臨川王 유의경劉義慶 찬 《세설신어世說新語》를 구성하는 여러 편篇 중 용지容止라는 이름이 붙은 데는 제목 그대로 용모와 행동거지에 관한 모음집이라, 그 첫 머리 일화가 위무장견흉노사魏武將見匈奴使라는 제하로 실린 다음 이야기다. 저 제목은 위魏 무제武帝가 흉노 사신을 접견할 때 정도를 의미한다. 

 

위 무제가 장차 흉노 사신을 접견하려 했지만, 스스로 몰골이 비루하니  먼 나라에 위엄을 보이기는 부족하다 생각하고는 최계규崔季珪한테 대신 자기 역할을 하게 하고는 무제 자신은 칼을 잡고는 어좌 앞머리에 서 있다. 친견이 끝나고서는 간첩을 시켜 흉노 사신한테 묻기를 "위왕은 사람이 어떻습디까?" 하니, 흉노 사신이 대답하기를 "위왕은 진짜 고아한 풍채가 남들과 다릅니다. 하지만 어좌 앞머리에서 칼을 쥐고 선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영웅입니다"고 했다. 위 무제가 그 말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돌아가는 흉노 사신을 죽여버렸다.  

魏武將見匈奴使,自以形陋,不足雄遠國,使崔季珪代,​帝自捉刀立床頭。事既畢,令間諜問曰: "魏王何如?" 匈奴使答曰: "魏王信自雅望非常,然床頭捉刀人,此乃英雄也!"魏武聞之,馳遣殺使於途。

 

이에서 말하는 위무魏武가 위 무제, 곧 조조曹操를 말하거니와, 그 자신은 결코 황제 자리에 오른 적고 봉건 제후로 죽었지만, 그의 사후 그 자리를 이은 아들 조비曹丕가 제위를 물려받은 다음에 아버지를 황제에 추존하고는 무제라는 존호를 올렸다. 

 

제일 왼편에 보면 위 무왕이 항상 쓰던 운운하는 글귀가 보인다. 조조묘 출토

 

최계규崔季珪란 최염崔琰을 하거니와, 계규季珪는 그의 字다. 자기 몰골이 형편없다 해서 그를 대신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최염은 풍채가 대단했음을 엿본다. 

 

이 세설신어는 같은 남조시대 양梁나라에서 유효표劉孝標라는 사람이 각종 주석 작업을 하거니와 이를 《세설신어주世說新語注》라 이름한다. 유의경 원전 《세설신어世說新語》는 망실하고, 우리가 아는 《세설신어世說新語》는 실상 《세설신어주世說新語注》다. 

 

위 일화에 대해 유효표는 설명자료를 보탰으니, 개중 하나가 손성孫盛이라는 사람이 찬한 《위씨춘추魏氏春秋》라고 해서 지금은 망실해 버린 책에서 끌어다 댄 관련 논급이니, 그 《위씨춘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무왕은 생김새가 키가 작고 덩치가 적었지만, 기백은 차고도 넘쳤다.  

武王容貌短小,而神明英發

 

조조묘 입구

 

이로 보아 조조는 그 생김이 땅딸보였음이 확실하다. 키는 작고 체구는 적은 그런 사람이었다. 일세를 풍미한 영웅이라 해서 키도 크고 덩치도 컸다 생각하겠지만, 역사가 증언하는 그의 외모는 형편없었다.  

 

한편, 조조가 대타로 내세운 최계규에 대해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에서는 그를 일러 "聲姿高暢,眉目疏朗,須長四尺,甚有威重"이라 했으니, 목소리가 졸라 우렁차고,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수염이 4척에 이르러 자못 위엄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조조가 한편으로는 이런 친구를 얼마나 선망하며, 한편으로는 또 얼마나 쪽팔렸겠는가? 

 

돌로 만든 패 종류다

 

저에서 인용한 《위씨춘추魏氏春秋》는 동진東晋시대 인물인 손성孫盛이 찬사撰寫한 역사서로, 전체 20권인 삼국시대 위나라 편년체 사서로, 앞서 말했듯이 원서는 이미 상실되고 대신 《홍명집弘明集》이라든가 《광홍명집廣弘明集》, 《전진문全晋文》, 혹은 《삼국지三国志》 배송지裴松之 주注, 그리고 《世說新語》 등지에 일문佚文이 남아있을 뿐이다. 

 

손성孫盛은 생몰년 미상이라, 자字가 안국安國이며, 태원군太原郡 중도현中都縣(지금의 산서山西 평요平遥) 사람이다. 조위曹魏 시대 표기장군驃驥將軍 손자현孫資玄 후손이자, 서진西晋 시대 풍익태수馮翊太守를 지낸 손초지孙楚之의 손자다.  

 

조조묘 출토 화상석이다. 

 

동진에서 출사한 그는 도간陶侃, 유량庾亮, 유익庾翼, 환온桓温 등의 막부에서 생활하고 일찍이 환온을 따라 성한成漢을 정벌하고 낙양을 수복하는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관직은 장사태수長沙太守에 이르렀고 오창현후吳昌縣侯에 봉해졌다. 만년에 관직이 비서감秘書監, 급사중給事中에 이르렀으니 그런 까닭에 후세에서는 그를 “손감孫監”이라 칭한다. 

 
저술이 자못 많아 《진서晋書》에서 그를 일컬어 “독학篤學하여 게으름이 없었고 어린시절부터 늙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특히 역사 저술에 특출남을 보였으니 그의 책은 “말이 곧고 사리에 맞았다詞直而理正”고 한다. 저술로는 《위씨춘추魏氏春秋》 20권 말고도 《위씨춘추이동魏氏春秋異同》 8권, 《진양추晋陽秋》 32권이 있으나 현재는 모두 망실되었다. 《진양추晋陽秋》 역시 《세설신어》가 곳곳에서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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