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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가진 것 없이 무작정 떠났고,
모지람이 많은 사람이라 석달을 싸돌아다녔으면서도 얻은 것 없이 빈손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내가 백범이 아닐진댄, 석달 실컷 싸돌아다니다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공포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도 물론 아니거니와,
그래도 몇몇 지인과는 이래저래 얽힌 사연들이 있어 돌아감을 고하지는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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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때도 그러했고, 또 떠나서도 그러했지만, 시종일관 제가 유지하려 한 흐름 하나가 있습니다.
비록 그렇게 느끼지 아니했을 분이 더러 계시겠지만,
나아가 농으로 두어 친구 가끔씩 불러내서는 넌 이런 건 안 봤지? 하며 골리는 숭을 내기는 했습니다만,
당신들은 오지 못하는 이런 데를 나는 왔고, 나는 봤노라 하는 그런 자랑질은 시종일관 경계하려 했습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시종 성찰이라는 자세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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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말처럼 쉽지 아니했고, 그렇게 비치지 아니했을 것임은 잘 압니다만,
그래도 나를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하나는 시종일관 유지하고자 했다는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여행 초반기, 이곳에서 만난 어느 지인이 그랬습니다.
당신은 왜 그리 한이 많냐고, 무슨 상처를 그리 심하게 받았느냐고.
그리 비친 나 자신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리 비쳤다면 내가 덜 시건방져 보였을 테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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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없이 떠났고 얻은 것 없이 돌아갑니다.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아니 더 솔직히는 거지 되어 돌아갑니다,
돈만 잔뜩 쓰고 돌아갑니다.
호기롭게 마누라 몰래 꼬불쳐둔 비상금 바닥 나서 돌아갑니다.
이번 여행에서 적지 않은 분께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어느 지인은 그리 친하다 할 수는 없고, 또 그 자신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님을 알며, 무엇보다 건강이 좋지 아니한데,
인연이라 해 봐야 고기 한 번 대접한 적밖에 없는데 그런 친구가 경비에 보태 쓰라고 10만원을 입금한 일이 있습니다.
눈물겹도록 고마워서 받았습니다. 그 정성 너무 고마워서 받았습니다.
이런 분들은 제가 살아가며 계속 기억해야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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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을 앞둔 애들, 마지막 스무날을 같이 보낸 애들한테 오늘 제가 그랬습니다.
"집보다, 가족보다 편하고 좋은 곳 없다."
내가 있어야 할 곳, 있어서 편안한 곳을 찾아 다시 돌아갑니다.
이스탄불 공항은 비가 내립니다.
열한 시간 뒤 인천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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