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을 사용하려고 먼저 시험 삼아 녹봉으로 나누어줌[用錢先試頒祿]
김우급金友伋(1574~1643)
듣자니 조정에서는 동전 사용하려고
백관에게 유달리 많이도 반사하다네
지팡이 짚고 나가도 돈 한 푼이 없어
나부끼는 주막 깃발도 자주 못보거늘
聞說朝廷用青銅, 百官頒賜也獨豐. 扶杖出門無一貫, 不堪頻望酒旗風.
[해설]
동전을 유통 보급하기 위한 화폐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633년(인조 11)에 조선통보朝鮮通寶를 법화法貨로 주조, 유통하기로 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만력통보萬曆通寶를 본떠 만들었는데 세종조에 주조, 유통하던 조선통보와 구별하기 위해서 팔분서八分書 조선통보로 주조하였다.
이 동전은 서울의 상평청常平廳에서 주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634년에는 안동·대구·개성 등 물산物産이 풍부하고 인물이 번성하며 상품유통이 원활함은 물론 동전 원료 및 시탄柴炭의 공급이 편리한 지방에서 주조, 발행하게 하였다.
이를 적극 유통하려고 1634년에는 수속收贖을 동전으로 받고 백관의 반록頒祿을 동전으로 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13년 7월 18일에 따르면, “최명길이 아뢰기를, '화폐를 사용하는 법은 비록 일시에 두루 하배下輩에게 시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수속은 모두 백관에게 화폐를 받도록 하여 녹봉을 지급할 때에 또한 나누어 준다면 매우 편리할 듯합니다. 그래서 본조에 물었더니, 옛 규례도 또한 이와 같았다고 하였습니다.'”라는 건의가 있었다.
*** 김태식 補
한반도는 동전 화폐 문화가 아니었다. 역대 정권이 무던히도 노력한 이 결과가 성공한 것은 식민지시대 들어와서였고, 더욱 구체적으로는 박정희 시대와서야 전국민한테 보급했다.
이 시에서 말하는 저런 동전 강제화 정책은 고려 숙종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언제나 물물교환이 우선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도 우리 동네 산간은 물물교환이 주류였다. 놀랍게도 70년대 대한민국이 물물교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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