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 생각보다 많은 동아시아 지식인이 일본에서 희망을 찾았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 시들어가는 그들의 조국과 비교해 볼 때, 개항 이후 열강화해가던 일본은 어쨌거나 좋은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이에 그들은 일본 유학을 경쟁적으로 떠난다. 베트남에서 일어난 동유東遊 운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다.
청일전쟁으로 양무운동이 스러졌고, 변법자강운동마저 실패로 돌아갔던 청나라에서도 일본 유학 붐이 인다.
청나라가 1912년 멸망하고 민국시대가 열렸지만, 일본에 유학가는 이들은 줄지 않았다.
노신(1881-1936), 곽말약(1892-1978), 주은래(1898-1976) 같은 거물들이 그 시절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본 유학을 떠났던 이들이다.
정작 이들은 일본에서 '중국'의 현실을 깨닫고 돌아오지만 말이다.
그런 그들과 비슷한 시기,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에 갔던 청나라 유학생이 한 명 있었다.
산동성 등주 출신인 왕신신王信臣(신신은 아마 자인듯 싶다)이란 양반인데,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몰라도 다카야마高山 大人이란 일본 군인에게 자기가 지은 시를 친필로 한 폭 써주었다.
재밌는 건 연도 표기 방식이다.
청나라 연호도 아니고 일본 연호도 아니고, 간지도 아니고 '정로征露 2년' - 러시아를 정벌한지 2년째라고 쓴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으면 그걸 저렇게 썼을까(하기사, 정로환도 그래서 '러시아를 정벌한 알약' 아니던가).
기점을 시작으로 하면 1906년, 종료로 하면 1907년이겠다.
필치는 제법 단정하다.
약간씩 획에 과장은 있지만, 젊은이의 글씨인데 그런 게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헌데 그 내용은, 미사여구를 걷어내면 딱 유학갔다 돌아가야하는 학생의 신세한탄이다.
다카야마 상이 하숙집 주인이었던가?
여러 해 고학했어도 학업 이루지 못했네
하루아침에 적 막아냄 어찌 쉽고 가벼우리
스물다섯 해일랑 하룻저녁의 꿈 같도다
능력 좋은 후배가 나의 정성 이어받으리
1882년 또는 1883년생이었을 이 왕신신 선생이 민국시대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헤쳐나갔을지 모르겠다.
그건 어찌어찌 지났다 하더라도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어쩌면 문화대혁명까지...
그 난리통은 과연 버티실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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