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나 조사를 가게 되면, 독재자이자 미친 X이 만든 건물이 당대에는 비극이었으나 세월이 지나 후손들에게 밥줄을 안겨주는 아이러니에 대해, 우리끼리 얘기하곤 했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북한에 다녀와서 주석궁을 보고 감명받아 만들었다는 얘기를 언뜻 듣고, 언젠가 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곳. 전후사정은 좀 더 복잡했지만.
미국 펜타곤에 이어 한때는 세계 제2위의 거대 건물이었고(지금은 네 번째라는데... 계산해 보진 않았음)
전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건물의 타이틀은 아직 유지 중이며(매년 조금씩 내려앉고 있다고 함)
어쩔 수 없이 루마니아 부쿠레슈티(부카레스트)의 상징이 되어버린, (구) 인민의 집 또는 인민 궁전, (현) 국회 궁전.
https://maps.app.goo.gl/jPtADr1GfTY7PZVU9
(이하, 편의상 익숙한 인민 궁전으로)
인민 궁전은 외부에서는 얼마든 볼 수 있지만 내부 투어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하루 전날에, 전화로만 예약을 받는다.
운이 좋으면 당일에 남는 자리에 껴 볼 수도 있다고는 하나, 예약이 안전하다.
내부에서 이런저런 행사가 많아서 미리 시스템으로는 예약을 못 받는다고 하는데...
(행사 계획도 미리 잡히는거 아님??)
무튼, 가고자 하는 날 하루 전날 현지시각 아침 9시가 되자마자 콜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구글 등에 나오는 전화번호는 대표 전화번호이므로 거기로 걸면 안되고
홈페이지에 나오는 예약 담당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야 한다.
+40 733 558 102 or 103
해외 티켓 대행사들에서도 입장권을 예약할 수는 있지만 추가수수료가 붙는 데다가, 입장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일단 홈피에서 결제부터 하고, 하루 전날 입장권을 구했는지 못구했는지 통보가 오고, 못 구하면 취소될 수도 있다는 조건이다.)
즉 꼭 가고싶다면 본인이 직접 전화로 예약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
같은 사람이 전화기 두 대를 다 응대하는 것 같았다. 내 전화를 받아들고 다른 사람 예약을 받고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친절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안 친절한 것도 아닌 쏘련 여사님 묘한 포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조금만 망설이면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므로 할 말을 미리 준비하고,
이런 상황에서 복잡하고 예의바르고 긴 영어는 서로 번거롭기 때문에 간단히 할 말만 하는 게 중요하다.
(두 번 끊김 당함)
"안녕하세요, 내일 예약해 주세요." / "언제? 몇명?" / "두 명이고요 오후 중 가능한 시간에 아무때나요"
"내일 3시에 오렴. 이름?" / "성은 ㅇ이고 이름은...." / "니 성만 알면 돼. 여권 꼭 갖고와."
"저기저기저기저기저기요 카드결제 되나요?" / "응 가능. 안녕." (뚝)
일단 루마니아 헨리 코안더 국제공항(구. 오토페니 국제공항)에 가긴 갔는데
방대한 한국 포털 사이트에 부쿠레슈티 시내행 공항버스를 타는 곳조차 제대로된 정보가 없었다.
물론 택시를 타면 간단했겠지만, 여행의 묘미는 대중교통이니.
공항에서 물어보니, 공항 앞에서 100번 버스를 타면 시내까지 간다고 한다.
구글맵스를 보니 얼추 구 시가지 근처까지 가는 것 같다.
교통권은, 버스에서 카드를 대라는데, 뭔 카드를 대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탔다.
오.. 다른 도시들처럼 모든 신용카드를 탭하기만 하면 돈이 결제되는 시스템이다. 선진 교통!
버스를 타고 휘휘 둘러보니.. 영어가 안 보인다..
여행다운 여행이 될 것 같은 기분.
이 앞쪽으로는 관람객이 들어가는 문이 없고,
정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담벼락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관람객이 입장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모퉁이쪽 언덕길이 아니고 아예 직각으로 더 돌아서 가야 한다.
입장료는 성인 60 Lei, 학생 30 Lei, 어린이 20 Lei
최소 15분 전에 도착해야 한다.
1번 숫자가 써 있는 부스 옆으로 가서 여권을 내고 예약사항을 확인한다.
오늘 9개 홀 중에 3개밖에 못 본다고 한다. 네.... 알겠습니다.
확인증을 들고 2번 숫자가 적인 부스로 가서 계산한다.
80 Lei : 약 25,000원
3번 숫자 앞에서 대기.
들어가면 보안검색대가 있다. 소지한 짐을 올리고 검사를 받고, 여권을 보여주고 방문증을 수령하면 된다.
계단을 올라가면 첫 번째 복도 겸 방이 나온다.
루마니아의 역사상 중요한 인물들의 흉상과 역사화들이 걸려있다.
가이드를 따라 오른쪽 강당쪽으로 들어간다.
멋진 공연장 겸 강당.
이 방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두 점을 감상해 보자.
현대 루마니아 화가인 사빈 발라샤 (Sabin Bălașa, 1932-2008)의 작품들이다.
스스로 본인의 화풍을 우주 낭만주의 cosmic Romanticism 라 설명했다.
이왕 행사장으로 활용하는거, 제대로 활용 중이다. (동영상 참조)
가이드와 함께 옆쪽으로 이동하면,
다른 방으로 이동.
인터넷에 찾아보니 이 건물에는 3,500여톤의 수정으로 480개의 샹들리에, 1,409개의 천정용 전구와 거울을 만들었고,
전체 중 95% 이상의 목재는 자국에서 충당했으며, 20만 제곱미터의 양모 카펫와 맞춤식으로 짠 커튼과 금은으로 장식한 벨벳 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대부분의 방들은 유료로 빌릴 수 있다고 한다.
(루마니아의 체조영웅 나디아 코마네치도 인민 궁전 내의 홀을 빌려서 결혼식 피로연을 열었다.)
나는 겨우 3개의 방을 본지라
유럽의 수많은 화려한 궁전들과 비교하는건 적합하지 않고
그렇다고 방마다 감탄이 나올 만한 독특한 디테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 건물이 지어진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한 바퀴 둘러보는 건 추천할 만 하다.
내부는 반드시 배정된 가이드와 함께 돌아봐야 하고(영어 또는 루마니아어)
가이드는, 기억에 많이 남지 않아서 미안해질 정도로 많은 얘기를 해 준다.
그리고, 몇몇 방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고.
챠우셰스쿠는 부카레스트(부쿠레슈티)의 랜드마크가 되어버린 이 건물의 테라스에서 멋지게 연설하기를 꿈꿨으나
1989년에 강제로 물러날 때까지 이 건물은 완성되지 못했고
그 테라스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인사한 이는 1992년에 방문한 마이클 잭슨이었는데.
"Hello Budapest!"
이후 2012년에는 400명의 아틀레틱 빌바오 Athletic Bilbao 팬이 유로파 리그 결승전을 위해 부카레스트Bucharest가 아닌
부다페스트Budapest로 날아가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3-0 패배의 가슴 아픈 일을 보지 못하는 일까지 생기자.
결국 이런 캠페인까지 하게 되었다.. (ROM 초코렛 회사 협찬)
여행자와 현지인이 아직 서로를 조금씩 낯설어하는 도시, 부쿠레슈티.(부카레스트)
인민 궁전 내부 투어와는 별도로 <Life in Communist Bucharest> 라는 주제의 Free Walking Tour를 했는데
'챠우셰스쿠의 아이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현지인 가이드 말에 따르면,
챠우셰스쿠는 이견이 없는 독재자임에 분명하지만
요즘의 경제 위기 때문인지 나이 든 세대들은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짧은 호황을 느끼기도 했던
챠우셰스쿠 집권 초기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민 궁전은 단순히 챠우셰스쿠가 평양 주석궁을 보고 본따서 만든 것이 아니라
최고급 건물을 짓기 위해 모든 재료에 루마니아산을 쓰고자 했던 나름의 목표를 가졌던 대 공사였고,
(아주 일부분에만 외국에서 기증받은 목재가 사용되었다고)
인민 궁전과 그 앞 직선 대로, 분수 거리, 소비에트 아파트 등은
평양 주석궁과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하고 싶었던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부쿠레슈티 대지진을 계기로 한 도시재건 토목공사의 일부였으며,
*루마니아의 중요한 문화재인 한 교회는, 이 도시계획을 위해 <통째로> 레일을 이용해 이전되었다.
https://youtu.be/OpFhvggsko8?si=2EN3vTkz0fOLlJMi
그 방식이 '지나치고' '강제적' 이었던 것도 분명하지만
이제는 '꼴 보기 싫지만 관광객들에게는 제일 잘 팔리는 아이템'이 되어버렸다는 얘기와 함께
'나와 내 후대를 위해서,
평범한 시민의 감정, 역사, 그리고 경제효과를 고려할 때
우리가 무엇을 보존해야 하고 무엇을 없애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가끔 헷갈린다'를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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